반수 도전 후기
[첫 수능의 결과]
첫 수능에서 나의 백분위는 1.5%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평소실력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존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평소 실력대로라면 1%정도의 성적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1%면 당시 연고대 인문계열 중 생활대나 사범대 등을 노려볼만 했는데, 딱히 어문에 소질이 있는 것도, 상경계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닌 나로써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런데 애매하게 1.5%의 성적을 받아서 상당한 행운이 있어야만, 매해 꼭 존재하기는 하지만 예측은 할 수 없는, 커트가 전년도보다 유독 내려가는 학과를 지원하는 경우에만 연고대를 진학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부모님은 매우 불만족했고, 그런 집안의 분위기로 인해 많은 고민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재도전의 결과]
두 번째 수능에서는 8개 과목을 응시해서 총 8문제를 틀렸고 상위 0.5% 정도의 성적을 받았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치뤘던 모든 모의시험 성적보다 제일 좋은 성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한 번 더 도전한 보람을 느낀 결과였다.
채점 후에 실제 성적이 나오기 전 모의지원 시기에는, 뭔가 잘 본 것 같기는 한데 얼마나 잘 본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전화 통화로 고등학교 입시반 선생님께 연고대 중위권 학과를 생각중이라고 말씀드리자 아직 이 점수로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식의 답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의 아니게 수능을 두 번 보고 두 번의 상담을 받아보니, 수업이나 생활에서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선생님이 입시에서는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하향지원을 유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나도 비슷하게 얘기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진짜 내 일처럼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기도 했다.
[재수를 통해 느낀 점]
전설 속의 신기루 같았던 수능대박이 나의 일이 됐다니 신기했다. 사실 내가 정말 수재였다면 수능정도의 난이도의 시험에서 컨디션이나 공부방법 등에서 그렇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수능을 보면서 확실히 내가 수재는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재수를 왜 그렇게 하기 싫어했을까 생각해보면 공부를 하며 느끼는 압박도 있지만 나는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너무 싫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일단 마음을 먹으면 싫어하는 공부라도 페이스에 맞춰서 꾸준히 할 수 있고, 압박감이 덜한 상황에서는 준비한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로봇처럼 공부만 주구장창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아이폰을 썼었는데 굳은 의지로 카카오톡을 깔지는 않았지만 앱스토어를 탐닉하며 독서실에서 몇 시간씩 휴대폰 게임을 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독서실에는 꼬박꼬박 갔고, 중간중간 공부를 아예 놓치는 않았으니 이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과가 좋으면 뭐든 좋은 것이니까.
반수를 한 것도 성공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갈 학교가 있다는 생각에 편한 마음으로 시험에 응할 수 있었다. 수능 도중 화장실을 갔다 와서도 담대하게 시험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다 어느정도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만큼 1학기는 대학생활을 하느라 손해본 부분이 있었지만.
[에필로그]
아마 첫 수능에서 언어영역을 한 두 문제만 더 맞았더라면 연고대에 진학해 그냥 잘 다녔을 것 같다. 고3의 나는 연고대는 어쩌면 갈 수도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서울대는 내가 노릴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연고대도 감지덕지인데 서울대에 가보자고 수능을 한 번 더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서울대 지원해 보려고 이런 우여곡절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수능을 다시 보게 되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번의 수능을 응시한다는 것은 다시 하고싶지 않은, 그래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다시 할 자신은 없는 경험이다. 그래도 덕분에 두 개의 대학교를 입학해 두 번의 대학생활을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나의 20대 초반을 구성하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경험이 됐다.
(3/3,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