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네 살, 늙은 대학생이 글을 쓰는 이유

많은 것을 늦게서야 깨달았기에...

by 고대윤


"서울대, 연, 고대를 입학하지 못하는 놈은 내 자식도 아니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점은 너를 낳았다는 것이다."
-나의 친아버지
"네 아버지가 아픈 이유는 네가 공부를 못해서야. 네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아버지께서 그렇게 아프시겠어??"
-나의 막내 작은 아버지
"너는 구제불능의 쓰레기야 이 새끼야. 너 같은 쓰레기들은 평생 그렇게 살 거야. 너 같은 새끼와 친구였다는 것이 나는 지금도 후회스럽다. XX놈아."
-나의 고등학교 동창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봐도, 가슴이 떨리고 아픈 기억들이다. 더불어,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꽤 오랜 시간을 들으면서 살아왔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야만 하는지 혹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기에 이렇게 정신적으로 큰 아픔을 겪으며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인정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공부를 못했고 혹은 입시 전쟁에서 패배했으므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패배자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인정 혹은 그 이상을 넘어선 체념이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줬다.


나는 현재 마흔네 살, 정상대로라면 대학교를 졸업할 나이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나이를 먹고 대학교에 재학 중인 가진 것 없이 나이만 많은 대학생이다. 지방 어느 국립대의 수의학과에 재학 중이고 이제 본과 3학년이 되며, 아직도 종종 시험에 대한 악몽을 꾼다. 그리고 10년이 넘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끌어안고 그 모든 것 역시 나의 모습이라며 살아가는 노총각이다.


이런 내가 나의 많은 숨겨왔던 나의 치부 혹은 우리 가족의 치부들을 들춰내면서까지 글을 썼던 이유는 나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나처럼 상처를 안고 살아가거나 혹은 한 때의 나처럼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 하는 그 누군가를 위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서였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학벌 혹은 사회적 지위에 상당히 예민하고도 오롯이 그것을 추구하시는 분이셨다.

지금에 와서야 정년퇴직을 하셨지만, 수없이 긴 공직 생활에도 불구하고 퇴직금을 비롯해서 많은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실 때의 그 명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아버지에게 남아있는 것은 겉으로는 그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더 좋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갈망하실 때, 그것을 말리지도 꺾지도 못하신 이유로 현재까지도 종종 경제적으로 고생을 하시며 살아가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음에도 그 신분을 뛰어 넘은 자동차와 무리한 경제적 행동등을 말리시지 못한 어머니의 잘못은 끝내 어머니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오고 말았다.


두 분의 삶을 지켜봐 왔을 때, 특히나 아버지의 삶을 봤을 때, 자기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오롯이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보면서 살아왔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 보일 때는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고, 그 어떤 일들도 다 손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그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내 주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인생의 진실, 나는 그 것을 직접 눈으로 배운 셈이다.




나와 내 동생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아니 내 동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내 동생은 현재 사고 후 걷지를 못한다. 사고가 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휠체어에 의지하며 생활을 하고 있으며 스트레스로 인한 돌발성 난청까지 발생한 상황이어서 매일매일의 삶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그것이 동생에게 남겨진 앞으로 남은 인생의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미어지고는 한다.


나는 겉으로 봤을 때는 멀쩡해 보이지만, 이미 20년 전, 20대 중반에 "장애인"이 되었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걷고는 있지만, 의자에 오래 앉아있다거나 혹은 허리에 무리가 오면 바로 통증이 시작되는 휠체어만 타지 않았을 뿐인 장애인이 바로 나다. 더불어 10년이 훨씬 넘게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동거를 했다. 처음 두,세 알로 시작되었던 약은 현재 8알이 넘었다. 상태는 호전되었다고는 하는데 약은 줄지 않는 기이한 환자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특히 나의 작은 아버지들을 비롯한 친가 사람들은 부모님께서 내게 교육적으로 엄청 난 투자를 하셨다는 착각을 하고 있지만(작은 아버지라는 분께서 내게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오해다. 오히려 그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쏟아부은 투자(꼭, 경제적인 투자가 아니라 마음의 씀씀이까지 포함한다면)에 비하면 나는 그다지 부모님의 후광을 받은 적이 없다. 20대 초반, 이 후로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혼자서 공부를 했고, 학원을 가는 대신 인터넷 강의를 시청하며 공부를 했으며, 그런 상황도 되지 않을 때는 혼자서 EBS 인터넷 강의를 시청하면서 공부를 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수학 문제를 풀을 때 써나가는 연습장의 가격(1,000원짜리 모닝글로리 연습장을 매일 한 권 넘게 사용했다.)이 아까워서 A4 복사지 혹은 갱지를 사다가 그것으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매일 써나가는 볼펜은 비싼 것은 아까우니까, 모나미 153 볼펜으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매일 한 자루의 볼펜을 쓰도록 공부를 하는 자식이 대견스럽기보다, 그에 들어가는 조금의 돈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그 나의 아버지였다. 그 당시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이 공부하는 것에는 단 하나도 지원을 해주시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는 돈을 거리낌 없이 쓰시는 호인 중의 호인으로 통했다.


수의대에 입학을 하던 해는 그나마 그 모든 것도 아까워서 나는 인터넷 강의 한 두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EBS를 통해서 공부를 했다. 나의 성적으로는 재수 종합반에서 1년간 장학생이 될 수 있었지만, 나는 무엇인가 복잡하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 그러니까 지금 표현하면 공황장애의 그 증상 그대로를 느꼈었기에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집에서 혼자 무료 강의를 보기도 하고, 봤던 책들을 몇 번씩 반복하며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 해에 수의예과에 입학을 했다.




나의 부모님은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학과가 아닌, 앞에 "수"자가 붙어있는 나의 전공이 창피하시다는 말씀 하나로 일축해버리신 나의 아버지는 전북에 있는 모 대학교의 교수께서 1년만 더 공부를 해서 자신의 학과(한의학과)에 진학을 하면 좋겠다는 그의 의견을 표방한 당신의 견해를 내게 전하며 압박을 가했지만, 나는 수의에과에 진학을 했다.


하지만, 나는 늘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 혹은 부모님에게 모자란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은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다녔고, 어느 날 대전 어느 곳에 위치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앞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우는 것으로, 정식적으로 우울증,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환자가 되었다.


시간은 몇 번이고 곱해지듯이 흘렀다. 나는 늘 우울했고, 가슴이 아팠으며 때때로 숨을 쉬지 못하는 색다른 경험을 하며 삶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에는 내가 죽고 싶어서 죽음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고, 또 반대로 어떤 때에는 내 의지와는 반대로 죽을 것 같은 증상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이 후로는, 늘 "죽음"이라는 단어와 가까이 지냈었다. 휴학과 복학을 몇 번씩 반복하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들어갔던 학교를 자퇴를 하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더 좋은 학교, 사람을 치료하는 과로 진학하고자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어떤 발버둥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럴수록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아마 그즈음이었던가, 나는 사진을 찍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사진이 아닌, 그냥 내가 보고 싶은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삶은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도 했으며, 행복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감정들 역시 그것이 내가 아니 우리 가족이 추구했던 삶과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내게 알려주었다.


내 나름의 기도의 덕분이었던가??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긴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는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의 뜻과는, 지난 삶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나만의 의지를 갖고 학교로 돌아왔다.


나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약을 매일 밤 8~9알을 먹으며, 시험공부를 하고 실습 보고서를 쓰면서도 내가 다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음을,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밤을 새우고 등교해서 시험을 보고. 어떤 날은 이른 아침 지는 별을 보며 학교에 등교하고 다시 새벽 별을 보며 귀가하기도 여러 번, 하지만 나는 내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어떤 미련이나 조그마한 후회도 없이 살고 있다.




이제는 결론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동안, 나의 이야기가 너무 길었으니 이제는 내가 글을 끊임없이 써왔던 이유에 대해서는 짧게 말을 해야 할 것도 같다.


나 역시, 내 공부가 잘 되지 않고 어려울 때면, 서점에 있는 자기 계발서, 수험기, 성공서 등을 찾아 읽었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내가 굳이 어렵게 찾지 않아도 그런 책들은 서점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있고는 했다. 하지만, 그 책들을 읽으면서 내 가슴 깊이 파고들었던 책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안타깝게도 나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통 가난하지만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수재였거나, 아니면 머리가 뛰어났지만 대한민국의 교육 환경에 맞지 않아서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가서 성공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집이 아주 부유해서 어릴 적부터 다른 나라의 좋은 교육 환경에 적응하여 성공하는 코스를 밟아온 전형적인 자기 자랑들이 즐비한 책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나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수재도 아니었고, (한 때는,머리가 뛰어난 줄 알았지만)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집안이 부유하지도 않았고(적어도 나에게는...), 그래서 유학을 가거나 다른 나라에 가볼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았다(심지어는 현재까지 그 흔한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본).


그냥 오롯이 내 힘으로. 그것도 나를 비웃는 사람들 틈에서 그 못 미더운 시선과 비웃음들을 뚫고 일어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또 손가락질했다. 심지어는 내 가족, 내 친지들이 더 그러했으며,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의 언저리를 떠돌았다. 나는 그 아픈 시간 속에서 내가 갖고 있었던, 내 가슴 밑에 움터 있듯이 있었던 비록,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일을 반복했지만 그로 인해서 다 단단해지고 더크게 자리잡는 무엇인가를 나처럼 가슴 아파하는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얼마 전이었던가, 유튜브에서 공무원 강의를 하시는 모 선생님의 채널에 나의 경험담을 댓글로 적었다. 비록,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그리고 힘들어하는 수험생들에게 작게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의 작은 바람은 오히려 내게 더 감사하게 돌아왔다. 그동안 힘들어서 공부를 그만 둘까 고민했던, 한없이 위축되었던 자신을 떨치고 아침에 힘차게 공부하러 발걸음을 옮긴다는 시험준비생에서부터, 꼭 가슴 따스한 수의사가 되어달라는 응원의 말까지, 더없이 감사하고 소중한 말들이 내게 세 배, 네 배로 돌아왔다. 그 짧지만 의미있는 글들로 인해 지금까지의 내 가슴속 응어리가 풀리고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마흔네 살, 불혹이라 불리는 나이를 넘어섰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대학생이다. 그리고 졸업까지는 2년이 남았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나를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기도 해서였다.


'너는 머리가 나빠서 안 돼.', '너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안 돼.'라는 주변의 비릿한 시선과 아니꼬운 비웃음을 이겨내고 '우리 집은 가난해서 안 돼.', '몇 년째 떨어졌는데, 앞으로 되겠어??'라는 자기의 환경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의심까지 털어낸 채, 시간이 갈수록 힘들고 더 눈물이 나더라도 일어나서 자기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나의 인생의 후배들이 많아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내고 싶었다. 잘난 사람들의 책, 뛰어난 사람들의 자기 계발서가 아닌... 나처럼 보통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그리고 아픈 사람 등 결핍이 있지만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세상의 따스한 빛으로 이끌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책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기로 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어쩌면 내가 겪었듯이 혹은 그래 왔듯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처럼 그래왔듯이그냥 이렇게 계속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묵묵히 크기는 작지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결핍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사진을 찍기로 했다.


나의 나이 마흔네 살, 남부끄러운 대학생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직도 세상에는 사랑과 관심, 그리고 그 힘을 토대로 꿋꿋이 일어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젊음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17일


아직도 가슴 아파하는 청년들에게


나는 종종 밤에 일어나는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약을 먹고 나서 했던 말들 혹은 행동들, 그런 것들은 머릿속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시험이 다가오면 늘 긴장을 한다. 약을 먹으면 기억력이 현저히 낮아질 수도 있고, 약을 먹지 않으면 갑자기 발작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든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내게는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쏟으며 살고 있다.

일주일에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 최대 10시간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시간을 지키며 나 자신의 나약함과 싸우고 이겨내려 한다. 그렇게 해도 나는 현재 나와 함께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런 내 나름의 노력을 통해서 나는 바듯이 본과 성적 B0 이상의 성적으로 본과 2학년을 마무리했다.

현재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 혹은 때때로 내가 너무 늦게서야 학교에 입학을 해서 인생을 다 망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타인이 어찌하든 그리고 내 주변이 어찌 되었든,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것, 그 목표를 향해서 내 모든 것을 걸고 뛰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삶이 더 단단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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