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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May 25. 2021

아파트가 높아질수록
내 위시리스트는 멀어진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시골 촌놈이 대전으로 처음 이사를 오던 날, 앞으로 내가 살아갈 아파트를 보면서 놀랐던 감정 하나, 하나가 떠오른다. 그 당시는 제곱미터 단위가 아닌 "평" 단위로 아파트의 넓이를 표기했었고, 가장 높은 아파트라고 해야, 15층을 넘지 않았다. 대전에서 아파트라고 해봐야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것도 내가 살던 서구 근처에 몰려있었다. 


"마루"라는 단어 대신 "거실"이라고 불리는 공간과 식당이 아니면 "식탁"에서 먹어본 경험이 없는 촌티 가득한 떠꺼머리 중학생에게 우리 가족의 "식탁", 우리 가족의 "주방"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자리 잡았다. 내 방의 창문을 열면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아파트의 뒷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는 "시장"이 아닌 "아파트 상가"에서 장을 볼 수 있었고, 그 당시까지 한 번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수입 과자들이 가득한 상가의 슈퍼마켓에 흥분했었다.


거실에 있는 인터폰으로 우리 집의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 화상으로 보여주는 작은 스크린이 달려있었고, 그 작은 스크린을 보며, 처음 텔레비전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라며 상상도 했다. 아파트의 주차장에는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수입차들도 떡하니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아파트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막 개발되기 시작한 서구의 일부 지역과 새로운 도심이

될 둔산 지역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으로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토록, 좋아 보였던 나의 첫 아파트는 그 당시 가격으로 1억이 넘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1억의 가치는 지금과 또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서구를 중심으로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평수들이 갑자기 팽창하듯이 커졌다. 이름도 "삼성", "현대", "경남", "삼부" 등... 주로 건설 사명을 대표로 하던 아파트들의 이름이 조금씩 변화되었다. 또한, 보통 30평 대 초반 위주였던 아파트들은 40평 대가 흔해졌고, 50평이 넘어가는 아파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널리기 시작했다. 단, 몇 년 사이의 일이었다.


내가 살던 단지에도 60평이 넘는 평수가 있었지만, 40평대의 아파트가 흔해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거의 질이 계속 높아져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파트가 가질 수 있는 어떤 상징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아파트의 브랜드화가 가속화되었다. "현대 힐스테이트", "경남 아너스빌", "롯데 캐슬", "동양 파라곤" 등등, 이름만 들어도 예전과는 차이가 나던 아파트들이 예전에 낮게 자리 잡고 있던 서민들의 집터를 무너뜨리고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20층을 넘고, 30층을 넘어서는 멋진 이름에 어울리는 고층 아파트의 등장은 곧 "주거지"가 어디인가로 시작될 "신분 계층의 분화"를 가져왔다.




반면, 우리 집은 어머니가 상가를 구입하셨지만,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우리 집은 돌이켜봐도 쓸모가 없는 소비가 많았다. 어떤 소비였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모든 곳에서 물이 줄줄 세듯 세어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후, 20대 중후반 서울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막살았던 인생 자체를 바꿔보자는 오기로 공부를 시작했다. 무작정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는 자극이 덜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 어느 이상, 소유하고 싶은 대상에 대한 목적이 있으면,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의, 식, 주에서 하나씩 목표를 정해서 그것을 이루고자 현실의 고달픔은 다 받아들였었다.


"주"에서 나는 그 당시 보편화가 되거든 "주상복합 아파트"의 "최고층 펜트하우스"를 구입하는 것으로 목표로 했다. 그리고 수술 후, 종종 진료를 받기 위해 서울에 다녀와야 할 때면, 서울 가까이에 들어서고 있는 높고 멋진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내 나이가 얼마가 되기 전까지 저 건물들의 한 부분을 꼭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을 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목표였을 뿐, 현실이 되지는 못했다. 




나보다 어리지만, 나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성공한 친구의 아파트에 초대받아 갔던 날, 50층(??) 아래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을 보며, 위에서 저 아래로 지나가는 나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질 것인가를 생각하며 우울했었다. 내가 노력하며 살아온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 한 채도 갖지 못했으며, 여전히 학생 신분으로 위에서부터 50층이나 아래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금세 착잡해졌다.


친구에게 또 가야 할 곳이 있다는 속이 뻔한 거짓말을 하고 더 머물다가 가라는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 밖으로 나서던 때, 나는 내가 인생의 패배자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것이 내가 노력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가져온 결과였으며, 그것이 내 위치였다. 그렇게 "주거지"에서 "아파트"는 완전히 신분 체계를 확실히 고착시켜버렸다.


몇 년 전,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여성과 잠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보다는 여러 조건이 더 나은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쉽게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게 혹시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평수에 어느 곳의 아파트를 장만해갈 생각인지를 물었다. 나는 그런 능력은 지금도 없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며 웃으며 말했고, 그 뒤부터 둘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만 맴돌았다. 그리고 그 뒤로 그분도 나도 그 어떤 인연도 이어가지 않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알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진다. 내가 공부를 한들, 돈다발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도 들어갈 돈들은 한정이 없을 것 같다.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해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니, 한없이 처량하기가 그지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수학"이나 "과학" 과목을 붙잡고 허툰 세월을 보내고, 다시 또 입학하고 몇 년간 어려운 전공 공부한다고 허송세월 보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를 많이 한다. 

차라리, 그 당시 내게 맞는 직업을 선택해서 남들보다 작은 임금이지만 받으며, 그것을 감사하고 그에 맞춰 살았다면, 나는 지금쯤 집은 한 채 갖고 있지 않을까?? 비록, 그 집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이름을 갖고 있는 넓은 평수의 고층 아파트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나는, 최근 내가 '인생을 너무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직도 나는 수없이 긴긴 시간을 더 노력하며 살아도, 쉬이 누릴 수 없는 것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고개가 저절로 떨어질 때도 있다. 내가 노력하면 하나를 이뤄갈 때쯤이면, 세상은 두 개, 세 개의 것을 토해놓는다. 아파트는 갈수록 높아지고, 그 이름들마저 더 호화로워진다. 그리고 그들의 세상을 향해 내뿜는 그 힘은 웬만한 존재들을 다 눌러버린다. 그들을 바라보며, 이제 나는 '"집 장만"이 더 힘들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비록 남들보다 더 오래 공부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던 것조차 우스워지고 초라해졌다. 이 것은 오직 "공부"만으로 세상과 타협을 해보겠다는 의지와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알던 세상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너무나 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달라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간격 사이에서 빙빙 맴돌고만 있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또 얼마나 달려야 할 것인가, 숨이 차도 무시하며 뛰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나는 매일 고민한다.


2021년 5월 22일


커버 이미지: 롯데 캐슬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만약에 콩심은 곳에서 다른 작물이 재배가 되면, 그것은 유전적으로 잘못되었거나, 팥을 콩으로 잘못 알고 심은 것에 대한 실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이 "인간 사회"였다. "콩"인 줄 알고 심었는데, "콩"이 아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곳, 그리고 혹은 "개천"에서 "용"도 나는 세상, 그것이 나는 진정한 자본주의 사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내가 바라보는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갖지 못했으며 더 이상 올라오지 마라.라는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 한 그들의 모습에 구역질이 날 때도 있다. 얼마 전부터 코인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잘못된 신호의 일종이다.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를 해도 위로 올라갈 길이 막혀버렸으니, 한탕주의로 튀겨보겠다는 생각이 온 사회에 팽배하다. 나는 이런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고, 그것을 내가 직접 증명하고 싶다. 또, 힘들어서 지칠 수도 있겠지만,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오르는 것 그래서 "당신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라고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도록 더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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