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대윤 Jun 06. 2021

외롭다는 것은
열심히 산다는것일 테니까.

날 위한 위로

실습이 있는 시간, 강의실에 맨 뒤에 앉아서 앞을 바라본다. 그러면 맨 뒤에 혼자 앉아있는 내 앞으로 군데군데 섬처럼 모여있는 학생들이 보인다. 그 모임들 하나하나가 서로서로 친분이 있는 집합이라 가정하면, 나는 "실습"이라는 집합(A)의 여집합이 되는 셈이다.


전체집합과 여집합

아니, 조금 더 크게 표현하면 수의학과 본과 3학년이라는 큰 전체집합(U)에서 "나"라는 여집합이 존재하는 셈이기도 하고. 어떤 표현으로 하던 나라는 원소는 전체집합에 소속되지 못하고 겉으로 나와있는, 배제되어 있는 원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을 비겁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정상적인 나이에 학교에 입학을 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상적이지도 못했고 공부조차도 못했으며, 그래서 다른 동기들이 정상적으로 대학을 입학했을 나이에는 방황을 했고, 사회 불순 분자 중의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늦게서야 "깨달았다."는 변명으로 늦은 나이의 입학과 학업을 변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맞다. 나는 조금은 비겁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비겁함의 대가로 종종 타인들과 자연스레 섞여 들어가는 것이 어렵기도 하다면, 비겁함의 대가 치고는 조금 비싼 것 같기도 하다. 나름 수의학과는 최근 성적이 더 좋아지고 있어서, 갈수록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으니까, 예전의 내가 바라보기에는 한 없이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모인 공간에서 그들은 "A"라는 큰 집합이 되었고, 나는 "A"의 "여집합"이 되었다.


"여집합"이 "A"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열심히 노트 필기를 해서 "A"의 원소들에게 제공을 한다든지, 아니면 실습 후에 보고서를 작성할 시, 가장 열심히 자신의 맡은 바 외에도 다른 부분도 공부를 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을 한다든지 하는 방법들이 존재한다. 나?? 나라고 그런 방법들을 통해서 "A"라는 집합에 소속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을 통하여 "A"라는 집합에 소속되려고 할수록, 나의 존재는 더 축소가 되고 가치가 저하되는 것 같다.




보통 어느 곳에나 마찬가지로 집합 "A"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A"라는 큰 집합을 다시 분류해서 보면, 가령,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가"라는 집합, 그리고 고등학생 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범생 XX, 빵셔틀이었지만, 대학교에 진학하고 그 과에서 조금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담배를 많이 태우거나 혹은 술을 많이 마시며 공부를 등한시하는 집합 그러니까 고교시절에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무리를 흉내 내는 집합.  후자를 집합 "나"라고 가정하면, "가"와 "나"의 교집합은 존재하기가 사실 많이 어렵댜. 여기서 한 번 정리하자면, XX, 빵셔틀에서 탈출한 원소들이 끝까지 모범생이고자 노력하는 원소가 되기에는 어렵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모두와 친분을 유지하고 싶었다. 17살에 흡연을 시작해서 25살에 담배를 끊은 내게 보기에, 대학에 와서 담배를 태우기 시작하는 그룹 "나"의 아이들도 그냥 귀여운 아이들에 불과하고 열심히 계속해서 공부하고 노력하는 그룹"가"의 원소들은 늘 대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의외로 "가"와 "나"는 서로를 경계하니, 이 것이 참 우습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거기다가 나는 나이까지 많으니 어디에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룹 "나"에 들어가자니, 애들 데리고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하고, 술도 마시지 않고, 흡연도 하지 않는 나를 반가워하는 친구들도 없고, 그룹 "가"의 원소들은 선천적으로 초식동물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나 같은 "육식 동물"의 송곳니를 드러내는 존재를 멀리한다. 결국, 나는 이러나저러나 다시 "여집합"이다.


그러면 선택해야 되는 것은 자연스레 하나가 된다. 그냥 나 혼자, "열심히 잘 다녀보자."라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애써 "쿨"한척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것은 혼자 해결하기에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얼마 전, 외과 실습 시간에 "Suture",  간단하게 말하면 외과적 처치 후 상처를 봉합하는 실습 시간에, 도저히 나는 진도가 나가지 않더란 말이다. "가"든 "나"든 진도가 쭉쭉 나가는데, 나는 한 가지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실습을 진행하는 인턴 선생님들도 나보다 다 나이가 어리고, 게다가 남자 선생님들이라 "여자 원소"들에게 관심을 더 가지고 지켜보기에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눈물마저 맺힐 뻔할 그때, 옆에서 한 친구가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힘든 것은 집에 돌아와서 과제를 할 때거나 혼자 공부를 할 때이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곳이나 물어볼 곳이 없이 혼자서 해야 할 때면, 외로움이 뼛속까지 밀려온다. 내가 왜 이 나이에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을까라는 한 없이 끝없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Suture를 위한 needle holder 와 과제를 하는 도중 부어오르기 시작한 손가락


이번 실습 같은 경우, 실습 시간에 이해하지 못하고 하지 못했던 것을 집에서 유튜브를 찾아서 수십 번을 돌려보며 혼자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엇이 알 수 없는 것이 가슴을 툭~~!! 하고 걷어찼다. Needleholder는 우선 길이 들지 않아서 뻑뻑하다 못해서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에 온 집중을 다해서 힘을 쏟아야 했고, 더불어 손가락이 타인들보다 상대적으로 기다란 내 손가락에 잘 맞지 않아서 생고생을 했다. "봉합사" 대신, 연습용으로 과전체가 구입한 검정 실은 얼마나 약하던지, 조금만 힘을 주면 툭툭 끊어졌고, 한 동안 잘 이어서 나가다가도 중간에 끊어져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수십 번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손가락은 피가 통하지 않고 쓸려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밴딩을 해서 보호를 해도 "홀더"와닿는 부분은 통증이 아주 쏠쏠했다. 숫자로 시작되는 욕설과 나만의 추임새를 넣어서 욕설을 내뱉어도 속은 풀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괴감은 더 커져만 갔다. 이 것이 바로 자존감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나의 모습 이리라.


이런 "외로움"은 어디에 하소연을 할 수 없는 것들 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내가 의지하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것은 전적으로 내게 결부된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종종 이야기하고, 하소연도 한다 하더라도 그것도 잠시 뿐,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는 또 손가락이 욱신거리며 아프고, 혹은 모르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거나, 읽고 외워야 할 교재는 앞으로도 한 참 남았는데 이제 시작에 불과한 상태에 머물러있다.


"가"와 "나"에 속하면, 이런 것이 조금은 덜해질까??라고 생각한다면, 한 번쯤 집합의 원소가 되어있을 때도 현재보다는 낫지만, 어떤 큰 해결책은 주지 못했다. 나와 같이 뛰는 누군가, 한 두 사람의 존재가 든든함을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현재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외로움"이라는 녀석 자체를 다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도 경험해봤다. 




아주 오래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구절을 애써 생각해냈다.


"외로워?? 외로우면 잘 살고 있는 거야. 그래도 너만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니까."라는 기억조차 희미한 그 구절은 입학하기 전에도 그리고 입학 후에도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고는 했었다. 나의 인생이라는 길은 나만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외길일진대, 그 길에 타인이 함께 걸을 수도 없는 것이고, 외로움을 느낄 때쯤 걸었다는 것은, 반대로 꽤 많은 거리를 잘 걸어왔다는 뜻도 되는 것이니까.


"성공"이라는 단어 속에는 늘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외로움"이라든가, "고독"이라는 대가를 생각하고는 했다.

교수님과의 면담에서도 "네가 이제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고 가정을 해 봐, 그 순간에 누군가에게 말하고, 상의하고 할 수 있겠어?? 어떤 자리에 올라서고 무엇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무게를 짊어진다는 것이니까. 그것을 이겨내느냐, 못 이겨내느냐도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너무나도 맞는 말씀이다. 중요한 순간에 내가 누군가에게 묻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상의하고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은 다 "성공"이라는 것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어나서부터 학교에 입학하고,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 사회에 구성원이 된 후, 죽을 때까지 가만히 생각하면 늘 결정의 순간은 찾아왔다. 다만, 그 순간에 있어서 나이를 먹어가고 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쯤이면 주변의 도움보다 나 혼자의 결정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은 맞았으니까. 




'나 외로우면 잘 살고 있는 것이네.'라고 생각하니 조금 편해졌다. 계획했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도, 그것을 알게 되고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더 성숙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도,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내가 나아지고, 더 발전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좀 외로워지면 어떤가.


이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힘들어하지는 말자. 비록, 훌륭한 이들의 삶에 비교해서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어 보이는, "성공"이라 할 지라도, 그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마주해야 하는 외로움과 피하지 말자.

또 조금, 외로우면 어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 없이 의지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 조금 응석도 부려보자.

그리고 어느 날, 정말로 너무 외로우면 또 한 날 멀리 떠나도 보고, 그곳에서 살짝 울어도 되니까, 꼭 외롭다고 이 것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어쩌면, 다 잘되고 있는 것이니까,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니까, 다 큰 어른이지만 성장통을 주는 것이겠지. 다 잘 될 것이다.


2021-06-06


커버 이미지: 구글


이제 기말고사 기간입니다. 총 6과목을 보는데, 이번 학기에는 미리미리 준비했는데도 허술한 것이 보이네요.

이런 구멍들을 찾아내다 보면, 외로움은 배가 됩니다. 이런 것들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 "페이스 메이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하지만, 결국 시험을 치러 들어가서 답을 쓰고 나올 때는 저 혼자니까요.

그것이 졸업시험이 되든, 국시가 되든 다 그렇겠죠.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끌어다가 한 번 글을 써봤습니다.

나이도 많지만, 그래서 더 모자라 보이지만, 잘 살고 있다는 스스로 칭찬해주기 위해서 말이죠. 이제 6월도 중반을 향해 갑니다. 다녀가시는 분들 그리고 제 구독자 분들 모두 다 건강하시고 편안한 6월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파트가 높아질수록 내 위시리스트는 멀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