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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Jul 02. 2021

사람은 올라가면,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개구리올챙이 적시절 생각 못하고...

"형님, 형님이 차 도색하는 그곳, 소개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저 부탁 좀 드릴게요."
"형님, 예전에 르노 삼성 자동차 서비스에 친하신 팀장님 있다고 하셨죠?? 그분 좀 소개해주실 수 있어요??"
"형님, 제가 오늘 안 좋은 일이 있는데... 술 한잔 사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부탁을 받을 때, 그리고 부탁을 받은 일이 원만하게 잘 처리되어 해결되었을 때에도, 부탁을 한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원하는 것이 없다. 애초부터 무엇을 바라면서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그것은 부탁을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나이가 많았던 나는 동기들에게 나의 친동생처럼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잘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학교를 늦게 입학해서 그 또래만이 형성할 수 있는 과의 분위기를 흐리는 것에 대한 미안함의 대가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사실 어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은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을 했다. 가령, 나의 차를 수리해 주시는 분께서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을 먼저 감지하고 수리를 해주셨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래서 나는 어떤 일정의 금액을 아낄 수 있었고, 안전하게 운행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면, 나는 그가 내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한 충분한 보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호의들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을 따로 준비하거나, 아니면 그에 맞는 어떤 보답이라도 꼭 하고는 했다. 


나만의 방식의 인사 표현은 내게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과 인연을 쌓도록 하는데 한몫을 했다. 더불어, 더 나아가 "호형호제"를 하거나, "친구"가 되어 우정을 쌓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내가 그들,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 존중을 바탕으로 더 나은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굳이 내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령, 지금 나보다 힘든 시기를 걷고 있는 누군가가 내게 도움을 청했을 때, 그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곳까지 함께 했을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더없이 만족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지, 그 뒤로 따라올 무엇인가에 대한 것을 기대하지 않은 것도 나의 인생 방침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민감한 편인 나는, 자동차의 이색이나 잡소리에 민감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자동차를 대상으로 사업을 하시는 분들과 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어느 일정 부분, 색이 새로 칠해졌을 때, 나는 원래의 색과 새로 칠해진 부분이 서로 차이가 없도록 작업이 완성되기를 바랐고, 그에 대해서 내 차를 작업하시는 사장님들은 일정 부분 많은 스트레스를 감당하셔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분들과 나 사이에 의가 나거나,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분들이 나로 인해 피해를 보시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시도록 특별히 더 성의를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신경을 쓰실수록, 많은 시간이 갈수록, 그만큼의 성의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과에는 이제 막 자신만의 자동차를 소유하기 시작한 동생들이 늘어날 때였다. 유난히 특별한 관계를 티 내는 몇 명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자동차에 이상이 생기거나, 외부에 상처가 생길 때면, 나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형님, 형님이 도색하시는 그곳, 사장님 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라는 식의 부탁을 나는 외면하지 못했다. 사실, 알려주지 않아도 그만이고, 알려주었다가 자신의 기준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혹은 작업을 하시는 사장님께 피해를 드릴 수도 있기에 신중해야 할 일이었음에도, 나는 기꺼이 연결을 시켜주었던 이유는 그만큼 내게 도움을 요청한 쪽도 나와 깊은 관계를 갖고, 정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내 이름을 담보로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작업을 하기를 바랐고, 더 좋은 품질의 결과물을 얻기를 바랐다. 그래서, 소개해 드린 업체의 사장님들에게 뒷말로 이런저런 말이 들리더라도 내가 대신 사장님들께 성의를 표시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심지어는, 몇 년째 연락을 안 하던 "K"라는 녀석은 뜬금없이 어느 날 밤 전화를 해서 "형님, 그때 형님과 친하다고 하셨던 르노 삼성의 팀장님(나는 오랜 시간 르노 삼성의 차를 탔었다.) 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왔다. "K"라는 녀석은 도색을 하시는 사장님께도 매 번 저렴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사장님을 난처하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팀장"은 그 자리를 떠나서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이제는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다시 녀석과 연락이 끊겼다.




녀석이 다시 연락을 했을 때는, 내 동생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였다. 자신의 결혼과 자신의 병원이 개원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통화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녀석의 결혼식도 병원의 개원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내게는 내 앞에 쌓여 있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에도 너무 힘이 드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녀석은 자신이 결혼을 잘한다는 것을 입이 달도록 말을 했었다. 자신의 병원도 처가의 도움이 컸다는 하지 않아도 될 자랑까지 하면서 녀석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다시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사회에서 알게 된 "J"라는 후배가 반려견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며, 내게 조언을 구해왔다. 물론, 내가 추천을 할 병원은 한 두 곳이 아니었다. 내 또래의 원장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병원은 더 많으며, 그 병원들을 소개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나는 "K"의 병원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K"에게 환자가 가서, 수술이 잘 되면 "K"의 오랜 고객이 될 테니까. 그리고 참석하지 못했던 결혼식과 개원식에 대한 미안함도 일부 갚을 수 있을 것 같은 내 작은 자존심이기도 했고.


"원장"과 "환자"를 연결시켜 주려는 목적으로 나는 "K"에게 전화를 했다. 


" "K"야, 슬개골 탈구(강아지에게 흔한 뒷다리의 질환)"가 있는 내 지인의 강아지가 있는데, 너의 병원의 수술비는 얼마니??" 
"XXX요"
"그럼, 내가 내 지인에게 너의 번호를 전해주고 너희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해도 될까??"
"아니요, 그럴 필요 없이, 그냥 네이버 보고 오라고 하세요."


녀석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제는 자신은 병원장이고 너는 아니니까, 혹은 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는 상태인데, 굳이 너의 그런 부탁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을까. 전화를 끊은 뒤에도 언짢은 기분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녀석은 나에게 자신을 더 이상 그 오래전, 자동차를 수리할 때 부탁을 하던 그 모습으로 기억하지 말라는 뜻인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너는 적어도 이런 병원을 개원할 수 없을 것이니, 너는 내 밑이다.'라는 뜻일까 몇 시간을 고민 후, 나는 "J"에게 다른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속담이 있던가. 사람을 개구리에 표현하면 안 되겠지만, 과거를 잊고 사는 듯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굳이,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바랐던 것은 없다. 나를 "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며 함께 해주는 것이 그저 고마웠을 뿐이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한 답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될 때가 많았다. 정작 자신이 넉넉하고 여유로워졌을 때의 행동은 자신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와 전혀 달랐다.


100만 원의 이익을 남기는 것과 또 한 명의 사람과 마음을 열고 사람 대 사람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 즉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나는 항상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주위에 현재 함께 하고 있는 이들 역시 그런 사람들이다. 때로는 나도 타인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다. 그리고 사과를 해야 했음에도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마음속으로 존중하고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 그들에게 비록 나의 상황 상, 그 무엇도 해 줄 수 없지만 말이다.


몇 년간 연락이 끝겼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럼에도 그와 나는 어제 본 것처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도 나도 서로에게 특별한 것을 바랐던 것이 없었고,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역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의 상황이 다시 좋아진다면, 누군가는 나에게 다시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다거나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줬던 이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K원장"같은 이는 곤란하다. 자신의 고객이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이제 거리를 두는 "병원의 원장"이라면

그가 과연 올바른 인격자인가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아픈 생명들을 바라보는 그 눈빛의 의미가 무엇일지는 아마 그 자신만 알 테니까.


202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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