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대윤 Jul 04. 2021

인생은 초콜릿상자와 같다.

하지만 누구나 달콤함을 맛볼 수는 없어...

혹시, "뽑기"라고 불렸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행성 놀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국민학교 시절, 학교 앞의 문방구에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호기심을 이용해서 얄팍한 상술로 포장하여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뜯어내는 사행성 놀이가 있었다. 그것은 몇 종류가 있었는데, 그 어떤 것이든 보통의 아이들이 그 놀이에서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이야 인형 뽑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전기로 이용되는 기구까지 개발되어서 사람들의 재미와 사귀심에 더 불을 붙이고 있지만, 나의  시절에는 그런 입체적인, 4차원적인 놀이는 없고 오직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놀이만 있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의 첫 번째 문방구는 소방서 옆의 할머니가 하는 문방구였는데, "띄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놀이가 있었다. 표준어로 달고나라 불리는 그 놀이는 누구나 다 알다시피 작은 국자에 설탕과 베이킹 소다를 넣어 불린 후, 평형한 판에 넣고 누른 다음, 여러 가지 모양의 틀로 그 위에 찍어 누른 다음, 아이들이 그 모양을 그대로 큰 틀에서 떼어내면, 한 번을 다시 해주거나 혹은 돈을 되돌려 주는 놀이였다.


어쨌든, 꽤 많은 아이들이 그 놀이에 도전을 했지만 제대로 하는 아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나 역시도 무수히 도전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조각을 할 만큼 섬세한 손재주가 필요한 놀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것은 사행성이라기보다 달고나 그 자체의 맛에도 반해서 하교하는 길에 할머니의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달고나의 달달한 맛에 자주 빠져 살았다.




다음 문방구부터는 여러 종류의 "뽑기" 놀이가 있었는데, 큰 종이에 "꽝" 혹은 "몇 등"이라는 단어가 인쇄되어 있는 몇 백개의 작은 종이를 스테이플러로 고정시켜 놓고 아이들에게 50원에 하나씩 떼어서 그 자리서 확인하는 놀이가 대다수였다. 이 놀이의 큰 상이라고 해봤자, 큰 잉어 모양의 싸구려 엿이나 혹은 그에 유사한 유치 찬란한 상품이 대다수였지만, 아이들은 미친 듯이 그 놀이에 빠져서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용돈이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고는 했다.


나 역시 그 얄팍하고도 유치한 상술에 이상하리만큼 의욕이 불타올라서 한 때 그것에 매달렸던 적이 있다. 유난히 "뽑기"를 잘한다는 명장이라 불릴 만큼 잘하는 아이를 찾아가서 그의 독보적인 전략을 청취한다던가, 혹은 그가 알려주는 대로 해보는 식으로 따라 하기도 했지만, (가령, 대각선으로 뽑으라거나, 혹은 3X3, 4X4등의 정사각형을 맞춰서 뽑으라거나..) 나의 성적은 늘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늦게 하교를 하게 되었는데, 학교 앞 문구점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문구점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주인아주머니에게 100원을 드리고, 두 번의 뽑기 기회를 받아서 두 장을 뜯어냈다. 첫 번째 장은 늘 그러하듯이 "꽝"이 나왔고, 기대 안 하고 툭하고 뽑은 두 번째 장에서 나는 "3등"을 뽑을 수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주인아주머니를 붙잡고, "아주머니, 3등이에요!!"를 외쳤지만, 아주머니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한쪽에 놓여있던 엿으로 만들어진 잉어를 내게 건네주셨다. 


위풍당당한 그 기세를 몰고 집으로 가는 도중, 나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한 번도 성공 하지 못했던 어떤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나도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어떤 흥분이었던 듯싶다.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지만, 어머니도 문구점 아주머니와 별다를 바 없이, 표정의 변화 없이 그런 불량식품을 뭐하러 사 가지고 왔냐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뽑은 것이라고 나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도 어머니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나만 그 잉어를 냉동실에 잘 넣어놓고 한 조각씩 아껴가면 먹었을 뿐, 그 뒤로도 내게 다시 그런 기회는 또 오지 않았다.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 are going to get."
(인생은 마치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네가 무엇을 잡을지 결코 알지 못한단다.)
- 포레스트 검프


그 뒤로, 한참이나 자란 뒤에 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이 대사를 우연히 알게 됐다. 마치, 내가 늘 무엇인가 더 큰 상품을 뽑기를 바라던 것처럼, 대사는 나를 향해서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맛있는 초콜릿을 뽑은 적이 없었다. 쓰디쓴 초콜릿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유통기한이 다 지나버린 것들까지 하나 같이 내 손으로 잡는 것들은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뽑기"판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을 하면서 이 것을 만드는 것일까?? 그냥, 무작위로 이 것들을 배열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확률을 바탕으로 이 것들을 맞춰 넣는 것일까...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던 국민학교 시절의 나처럼, 나는 머리 아픈 삶의 공식들을 떠올리고는 했다.


하지만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직접 손수 잡은 초콜릿을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늘 어렵고도 성가신 일이었다. 맛이 없는 초콜릿이라서 입에 넣었다가 뱉어낼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결정한 것은 내가 책임지고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초콜릿 박스"였다.




상자 안의 어떤 초콜릿을 잡을지 모른다는 것을 어렵게 그리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문득 이제 더 이상 상자 안에 있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초콜릿이 내게 잡히기를 바라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내 손에 닿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 누구도 쓰디쓴 초콜릿이나 유통기한이 지나 상해버린 초콜릿을 찾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초콜릿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은 초콜릿 상자에 손을 넣고 가장 맛있고 멋진 초콜릿을 골라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내 힘으로 "인생의 달콤함"을 맛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초콜릿을 만드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세상의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때로는 내가 만든 초콜릿이 한없이 보잘것없을 때도 내 인생 그대로의 초콜릿을 입에 넣었고, 그 씁쓸하거나 이상한 맛의 초콜릿이 내 입에서 펴져나가면서 사라지는 시간 동안 씁쓸함과 안타까움과 힘든 시간을 감내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달콤한 초콜릿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박스 안에 있는 그 어떤 달콤하고 아름다운 초콜릿이 저절로 내 손에 닿기를 바란 적도 없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 전에 만났던 그 크고도 아름답던 잉어 모양의 큰 엿 이후에 나는 달콤한 그 무엇을 입에 넣지 못했다. 전공을 다시 선택해야 했던 것도,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 순간마다 나는 늘 심사숙고해서 나만의 초콜릿을 만들어 보려고 했으나, 늘 실패했다. 


인생의 달콤한 초콜릿은 내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만약, 내가 정말 달콤한 초콜릿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면, 지금으로부터 훨씬 오래전부터 나는 그 달콤함을 음미하면서 살 수 있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씁쓸해서 늘 입에서 뱉어내고 싶었던 그 초콜릿이 가장 나에게 맞는 초콜릿이라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인생 혹은 삶이라는 상자 안에 손을 넣을 수 있는 것도 한정적이지만, 내가 가진 재료로도 초콜릿을 만들 수 있는 것도 한정적일 테니까. 나는 이미 그 재료를 다 써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째, 내가 선택하지 못한 초콜릿과 만들지 못한 초콜릿에 대한 생각을 한다. 내 초콜릿은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잉어 모양의 엿을 뽑았을 때, 문구점 아주머니가 보였던 표정처럼, 아니면 내가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자랑을 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가족들 모두의 반응처럼 대단하지 않은 것인진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조금 더 달콤하고 멋진 초콜릿은 그 어디에서 잡히지도 않았고, 내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은지도 모른다. 딱 이 정도의 달콤함과 무게가 내게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내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꼭 달콤하거나 모양이 예쁜 초콜릿만이 좋은 초콜릿은 아니란다. 아직도 네가 인생이라는 것을 다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야.'


그러나 꼭 한 번, 아니 찰나의 순간만이라도 겉모습만이라도 내 모양에 쏙 드는 초콜릿을 만날 수 있다면, 그토록 헤미이고 다닌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면, 나의 욕심은 너무나 큰 것일까?? 그런 행운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 갖는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 일이다. 그것을 알게 될  때쯤이면, 인생 속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도 없다는 것도, 인생이라 불리는 초콜릿 상자도 너무도 크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지금, 내 입 안에 있는 초콜릿의 맛은 너무도 쓰디쓰다.


2021-07-04


커버 이미지; 구글(쿠루쿠루)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은 올라가면,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