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둘러싼 것들에 감사하기를.(어떤 날)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던 겨울날들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냉기 어린 방 한가운데 침대에 누워서, 조금은 부들부들 떨면서 내년에 '또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을 하며 눈을 꼭 감고 있는 것 밖에는.
물론 용돈이라 불리는 것도 없었다. 부모님들은 내게 용돈을 주지 않았고. 나는 계속해서 더 끝으로 내몰리다 못해, 이제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는 몰골로 깊은 나락 속에 빠져들었다.
어쩌다가 몇 천 원의 용돈이라도 생기면, 동네에 있는 작은 책방 대여점을 찾았다. 그곳에는 내가 숨 쉬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몇 천 원의 돈을 운동복 바지에 꾸깃꾸깃 넣고서 책방에 가서 그전에 읽지 못했던 책들 몇 권을 골랐다. 그리고 마치 지금 당장이라고 떠날 수 있는 여행 티켓이라도 얻은 양, 내 나름의 발그레한 미소로 책방을 나섰다.
그리고 책을 빌리고 남은 돈 1,200원으로 상가에 있는 작은 제과점에서 산 딱딱하게 굳은 바게트 빵을 식량 삼아서 나만의 여행을 떠났다.
책을 읽을 때면, 잠시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모님의 거친 목소리도, 그리고 추운 방에 혼자 있어야만 하는 그 외로움도, 내게는 잠시나마 멀어질 수 있는 여행의 길이였다.
책 속에는 목적지가 있었다. 만약, 돈이 없었을 때는 읽었던 책들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청준"의 "눈길"을 읽으면, 어머니가 눈이 부시도록 서글피 우시던 눈밭은 어디인지 궁금했고, 그곳이 내가 아는 곳이 아닐까, (비록, 여행 가본 곳도 없지만.) 깊은 눈길에 빠지며 아들을 아침 일찍 떠나보내야만 하는 어머니의 아픔이 마치 내 것만 같아 훌쩍이기도 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는 글의 주제를 더 돋보이도록 만드는 "안개"의 이미지에 취해 나도 깊은 안갯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았다. 아니, 나도 깊은 안갯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안개는 참 특이한 것이 있는데, 안개라는 그 대상이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따스하게 변하기도 하며, 아주 땅에 가운 곳에 깔려 음산하기도 하다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사라질 때는 아쉬움마저 겉돌기도 한다. 그래서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날이면 기분이 묘하게 더 많이 요동치기도 한다.
이슬점과 그날의 포화 수증 기압이 맞나 생성되는 그 물방울이 사람이 기분을 좌우한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푸른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보는 기분과 지표에 낮게 깔린 안개를 보는 기분과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안개는 바로 지표의 구름이기에 하늘 위에 높이 떠있는 구름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 같아닐까.
터무니없이, 일찍 일어난 날도 그랬다. 창 밖으로는 안개가 자욱했다. 내가 사는 지역의 특성상, 안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발코니에 앉아서 안개를 뚫고 아주 희미하게 전달되는 가로등을 보다가,
안개가 점점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안되겠다. 다 사라지기 전에 조금 더 깊은 곳 속으로 갔다 와야겠다.'
외출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나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자동차 열쇠와 카메라 하나 그리고 생수 하나를 챙겼다.
"자, 나는 이제 미지의 안갯속으로 탐험을 떠난다."
그대로 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아파트 정문을 지나쳐 잠시 차를 세운다. 조금 전보다 약해진 것 같지만, 아직도 안개는 내게 손짓을 한다. 그대로 곧장 조금 더 깊은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음에도 안개는 차갑다. 아마도 내 기분과 더불어 따스하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도심으로 나가는 합류부에 비상등을 켜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을 본다. 내 자동차의 비상등은 잘 보일까. 아쉽지만 이번 탈출에서 안개의 아주 차가운 맛까지는 보지 못할 것 같다.
의대 합격에 대기 번호 몇 번을 앞두고 추락한 해가 있었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열심히 노력했기에 아픔이 두배였던 해였다. 나는 그 해 가을, 명절까지 학원의 특강까지 들으며 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 그리고 특강이 모두 끝나고 밤이 깊어 집에 돌아오던 때, 시각보다도 더 먼저 후각으로 안개를 인지했다.그리고 촉각으로. 안개는 차가웠다.
아직 10월에 불과했지만, 안개는 차가웠다. 그리고 짙고도 낮았으며, 더불어 두터웠다. 그 안개를 보면서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물러나지도 않겠다며 결심을 했다. 차갑고도 차가웠던 그날의 안개와 그 안개와 마주했던 나의 결심에도 불과하고 그 해 입시에서 마지막 대기 3번여에서 나는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인식하지도, 혹은 인식하지 않을지도 모른 채, 바다 위를 채우는 안개를 바라봤다. 조금씩 아니 많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그리고 특정 짓지도 못하고, 표현할 수도 없는, 생명도 없는 존재들이 마치 생명체처럼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안개는 주위를 가득 채웠다.
오래전, 내가 차갑고 짙은 그리고 무겁고도 두터웠던 안개를 마주했을 때와 전혀 달랐다. 편안했고, 따스했으며 그리고 포근했다. 해가 넘어선 지 한 참이나 지난 시간을 인지하면서도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사람에게조차 받아보지 못한 보호막 같은 포근함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을 안다. 물건도, 사람도, 심지어는 날씨까지도.
어떤 날의 날씨는 나를 정말 힘겹게 한다. 차갑고 누룩 하고 무겁고 겁이 난다. 그런 날은 식은땀마저 흘리면서 집에 돌아온다. 하지만, 나의 집에는 그 무게 넘는 무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날은 무겁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선다. 안개가 자욱하게 주변을 둘러쌌지만, 조금씩 나를 둘러싼 그 무엇들이 나를 채워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설사 시험이 몇 개가 있는 날이라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안개는 날씨의 한 종류일 뿐이다. 비가 오던지 혹은 눈이 내리던지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간다. 안 좋은 일을 겪은 날이면 날씨가 좀 특별한 날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화창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아예 더 흐리고 비가 오거나. 비가 오면 빗소리에 기대어 조금 울면 어떤가,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날에는 보이지 않게 두꺼운 안개에 숨어 조금 흐느끼면 어떤가. 차가움도 따스함도 모두 다 조금만 깊게 보면 하나에서 오는 것을.
부디, 나를 둘러쌓고 있는 것을 비난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를,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포옹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조금 더 세상을 사랑할 수 있기를.
2021-09-19
글/사진 고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