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뾰족한 감정의 비...

(순간)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가져오는 날

by 고대윤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감정선은 꽤나 복잡해서 무려 9알의 약을 매일 밤 먹으면서도 그 변화가 아주 가파르다. 그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때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고, 여느 때는 모든 것이 다 슬프고 힘들어 보일 때도 있다.


비...비가 내리는 날은 내 감정이 더 무거워지는 날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브러쉬로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면 어느 순간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실을 떠나 마치 붓으로 물감을 흘리듯이 그린 유화 같은 느낌도 난다. 미술에서도 수없이 많은 "-사조, 주의"가 태어났다가 사라져갔다. "인상주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등등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꽤 많은 사조 속에서 굳이 비내리는 날과 비슷한 사조를 찾아보자면 아마도 "인상주의"쯤은 될까??


아니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것은 어쩌면 그리는 사람만 알고 있을, 그러니까 비를 내리는 사람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떨어진 빗방울의 무게와 크기가 클수록 나의 감정의 폭은 더 커져만 간다.





비 내리는 날,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더 우울해진다. 왠지 나같은 인생의 쭉정이가 수없이 소중한 사람들의 불편함을 바탕으로 내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한다. 이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지만, 그만큼 비는 나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차갑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 우산을 쓰지만, 그 것도 때로는 녹록치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바라보는 것은 내 우울감에 한 층을 더 쌓아올린다. 내 안에 가득 자리잡게 된 패배감 혹은 자괴감이 일말의 형태로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비는 도시의 색마저 바꿔버리고, 그대로 어둠과 같은 시간을 앞당겨버린다. 아침부터 저녁 나절까지 내려앉은 하늘은 몇 발자국 앞서 온 내일같이 느껴진다. 아직까지 채 끝내지 못한 오늘의 모든 것들을 내일로 미뤄버리는 듯한 감정은 사람에게 초조함을 더해간다.



그나마 나를 달래주는 것은 비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걸어가는 행인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우산의 색이다. 예전보다 한결 밝아진 우산들의 색으로 인해, 행인들의 얼굴도 조금이나마 밝아진 것 같다. 아니면, 비록 내가 먹어야 하는 약의 수는 증가했지만, 그럼에도 현재 내가 흘려보내는 상황들이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든지, 내 자괴감이 아주 조금이나마 안으로 더 깊숙히 들어갔거나, 그 것도 아니면 조금 작아졌거나.

하지만, 나와 상관없이 다행인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비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는 것이다.




00310420.jpg


아직도 나를 힘들게 만드는 차가운 감정의 비는 아주 그치지 않았다. 다 잊은 듯, 그쳐서 이제는 해가 뜰 듯 하다가도 어디선가에서 갑자기 소나기처럼 쏟아붙는다. 그리하여 아직도 그 차가운 감정의 무엇을 다 피하지 못한 나는 애써 몸을 구부려 더 이상 젖지 않으려고만 노력한다.


내게도 이제 우산이 필요하다. 차가운 그 무엇을 살짝이라도 막아줄 다릿살이 여러개가 부러진 우산이라도 나에게는 요원하다. 언제인가 차가운 그 무엇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날, 감정의 날선 기복이 조금이라도 걷혀지는 날, 나는 지나가는 누군가의 우산을 받아들고 내 차의 키를 그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21-10-04


사진/글 고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