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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Oct 08. 2021

핫도그 위의 단맛, 신맛의 조화

(장소) 나는 오늘도 중앙시장에 간다.

백화점에 가지 않은지 대략 10여 년이 지난 것 같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렇게 드라들수록 통장의 액수는 말라가지만 알 수 없는 묘한 물질에 대한 만족 욕구가 내 가슴을 그만큼 채워 오르기에, 아까운지도 몰랐고 아깝다고 생각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시장에 가 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시장이라 함은 어머니들께서 보시는 장이라든가 왠지 식료품에만 관계되는 것만 같아서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장에 다녀오는 모습은 양 옆 손에 큰 자루 무엇인가를 가득 쥔 모습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자루를 들 일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별 것 없으니 이제 갈 이유도 없는 법,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시장을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전역 근교에 잠시 갈 일이 생겼는데, 갑자기 "중앙시장"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휘휘 저었다. 그리하여 나는 30대 중반이나 먹은 나이에 갑자기 시장을 처음 구경하는 이제 막 5~6살이 먹은 미취학 아동처럼 생경한 그곳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걷고 또 걸으니 아주 오래전 어머니와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곳이 어디쯤일까, 미간을 찌푸리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곳을 향해서 뛰었다.

아직도 그곳에 어머니와 다녀갔던 그곳이 남아있었다. 마치 갖고 있던 필름 카메라로 그곳을 찍었다. 사진을 찍어서 옛 기억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했던 나의 목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기억의 끈이 아스라이 잡히더니, 퍼즐도 조금씩 맞춰졌다. 아지만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일 뿐 내 기억을 완전히 일깨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서 잠시 훌쩍였다.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리고 잊은 채로 너무도 오래 지나왔던 그 시절이지만 비로소 아주 작게나마 맞출 수 있게 되었기에.




그 뒤로 나의 시장 탐방은 계속되었다. 사진 찍는 것도 시큰둥해지고 무엇인가 지루하고 지칠만하면 그곳에 가면 없던 힘도 충전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낮에도 밤에도 내가 울적할 때면, 시장이 다 파하고 문을 잠근 후에도 그곳을 향해서 길을 나섰다.



시장은 생각보다 활기롭다. 시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흥미롭고 문득 합석도 하고 싶어 진다. 그들만의 파티 안에 들어가고 싶어 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님이 많든 적든 따스해 보인다. 나는 늘 마음의 온도가 다른 사람보다 몇 도 정도가 낮다.


그들만의 파티는 조촐하지만, 따스하다.


내가 만들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영향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온도가 낮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이야기다. 특히, 겨울날 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게 모자란 온도가 나를 채워준다.


이 정도면 그래도 얼마 동안 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온도를.





그리고 시장은 내 인생의 선배님이자 선생님들이 모여서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그분들은 인생에 대해서 한결같다. 그들의 삶은 나의 인생관과는 전면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 그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분들이 살아온 삶은 그 누구의 삶과 비교할 수 없도록 치열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살아오셨고, 그래서 인생에서도 성공하셨고, 자녀분들까지 훌륭히 다 교육시키신 우리 시대 이전의 부모님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장을 가면 그 긍정의 에너지를 받아올 수 있었다 보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은 오래전, 학교 앞에서 사 먹던 핫도그의 맛을 기억하시는지. 학교가 막 끝나고, 그 자유와 해방감에 불이 나게 뛰어나오다가 학교 앞에서 마주친 핫도그 하나에 설탕을 가득 묻히고, 그 위에 또 케쳡을 층층이 모양 지도록 발라서 먹는 그 맛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요즘 왜 그 핫도그가 맛있었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빠져있었다. 그것은 핫도그가 달콤하지만도 않아서일지도 아닐까. 달달한 설탕 위에 굳이 시큼한 케첩을 뿌리는 이유는 아마도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맛에 중립을 잡기 위해서가 아닐까.


단맛과 신맛의 조화는 늘 절묘하다. 핫도그 위에서도 그렇고, 중화요리 탕수육도 그렇고. 그들은 모두가 다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음식의 맛을 또 다른 쪽이 묘하게 잡아주면서 서로의 장점을 끌어올린다. 인생도 다 마찬가지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분명 달콤 달콤한 날들도 필요하다. 인생이 너무 쓰거나, 시거나 하면 사람들은 버티지 못한다. 나 역시 그래서 원래의 길에서 한참이나 벗어나서 방황을 했다. 하지만 너무 달콤한 날만 가득해도 안 된다. 아무리 달콤함으로 가득 차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때때로 시큼 텁텁하기도 하고 심지어 쓰기도 한순간도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양쪽이 다 필요하다. 그 양쪽을 보고 싶으면 시장에 가면 된다. 무엇을 사지 않아도. 그리고 무엇을 먹지 않아도 좋다. 나는 되도록 무엇 하나는 먹는 편이지만, 구경만 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곳이 또 "시장"아닌가. 


겨울이 다가온다. 그러면 장사하시는 분들도 더 힘들겠지.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분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너무도 신맛이 돌아서 이 하나 들어가기 힘들 것 같이 쓴맛까지 도는 세상도 또 언젠가는 단맛이 그동안의 아픔을 덮여줄 것이다.


지금 쓴맛을 다시고 있는 분들이여,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말하고 싶다. 분명 곧, 케첩 속에 숨겨져 있던 달큼한 설탕의 맛이 되살아날 테니까.


2021-10-08


사진/글 고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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