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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Jul 01. 2023

나는 졸업식에 울지 않았다.

내 인생의 졸업식은 아직 남아있다.

2월 25일이었던가. 카톡을 통하여 졸업식에 대한 내용들이 분주히 오갔다. 나는 불합격생 두 명 중에 하나로, 그 카톡 내용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감싸고 이 불명예스러운 일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더 깊고 깉은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내가 국시에서 불합격할 것이라고는. 솔직히 아주 불안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동떨어져 불합격을 했다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1년을 버텨야 되는 것인가에 대한 염려보다도 모멸감을 먼저 선사했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죽는다면 나는 매번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 몇 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내 반려견 유키(이하 녀석)가 실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녀석으로 인해 내 우울증이 더 깊어졌다는 것을 녀석이 알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확실히 졸업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때는 대도시로 전학 온 뒤로 도시 아이들의 텃세에 즉 왕따를 겪고 나면서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졸업식 날 1등으로 졸업하면서 그 서러움에 엉엉 울었다. 부모님은 경사스러운 날 왜 그러냐고 하셨지만, 내가 아이들의 텃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을 알지 못하시는 부모님과는 생판 다른 무엇인가가 나의 내면을 할퀴고 지나갔다. 


중학교 때는 어떻게 졸업식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은 내가 친했던 친구들과 같이 사진을 찍는 것도 마땅찮해 하셨다. (내 친구들은 학교 내 1진이라 불리는 학생들도 섞여있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것과 달리 내 중학교 3년 시절 동안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던지, 중학교 졸업식의 분위기는 싸했다. 졸업식이 끝난 뒤 어떻게 시간이 흐른 지도 모른다. 눈 떠보니 난 고교생이 되어있었고, 고교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한 채 3년을 빙빙 학교 외로 돌았다. 누군가 하나 따스한 말을 해주지 않던 그 시절, 나는 출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어른들에게 나름의 복수로 대행하였고, 그 결과 나는 자퇴 권고생까지 정말 자랑스럽게도 이름을 올렸다.


"자퇴할래, 무릎 꿇고 빌래?"라는 질문 앞에서 "자퇴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내뱉고 학교를 나오던 날, 나 스스로가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내가 마치 무엇이라도 된 것 마냥 들뜨고 들떠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늘 반전이 있었기에, 끝끝내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올 팔자였고, 나머지 1년 동안에는, 전교 순위권 안에 드는 성적으로 나 스스로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현재까지도 가장 어렵다는 수학능력시험의 당사자였고, 그 난이도에서 박살이 났다. 그리고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재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졸업식 날, 나는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졸업식에는 가야 되지 않겠냐는 말에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했고, 그날 내내 대전 시내 한 바퀴를 빙빙 도는 것으로 나의 졸업식을 대신했다.


이상하게도 나의 졸업식은 평화롭고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졸업식이라는 단어는 늘 내게 생소하게 다가왔고, 거리가 먼 행사라는 생각뿐이었다.


올 해도 역시 그랬다. 합격을 했어도 졸업식에 가지 않았을 것이 뻔하디 뻔한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가지 않는 것과 참석할 처지가 되지 못해서 가지 못하는 것은 영 다른 이야기기에. 

만약, 졸업식에 참석했다면 나는 오히려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 학업의 끝을 맺는 날이 될 테니까, 나는 수십 년이나 반복되고 계속되었던 내 인생의 쓴 맛이 사라지는 것에 오열을 할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다행히 학교에서조차 나를 부르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불명예가 내 앞에 있었다. 너무나도 불명예스러워서 눈물은 다 씻은 듯이 말라버렸고, 그 덕분에 나는 울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학교에 입학 후 자퇴, 다시 다른 학교로 재입학, 또 재입학 끝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온 학교였지만, 처음부터 부모님과의 마찰과 반복되는 분란으로 마음 놓을 날이 하나도 없었던 학창 생활이었다.


나이가 많기에 어울리지 못했고(마음 놓고 터놓고 어울리지도 못했고), 혹시나 나이 먹고 이곳까지 와서 공부도 못하면 웃음거리가 될까, 늘 노력했지만 결국에 나는 가장 중요한 시합에서 지고 말았다. 졸업식은 그것을 되새겨주는 행사에 불과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 그리고 그렇게 아쉽고 분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린 나 자신에 대해서 한심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오히려 눈물을 펑펑 흘릴 만큼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반증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학업의 기간은 모두 끝나고 남은 것은 다시 국시뿐이다.

내 평생 있을 졸업식도 모두 다 끝나버렸고 타인들에게 축하를 받을 일도 그리고 내가 스스로 눈물을 흘릴 일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직 내 앞에 남아있는 "졸업식"과 같은 수많은 이벤트들은 그대로이다. 아직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이제는 다시 한번 다른 도약을 위해 도움닫기를 할 때이다.


다시 한번 날아보자. 날개야 돋아라.


2023-07-01


이미지: 구글

Written by 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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