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좋아하던 아이
초등학교 정문 앞에 가끔 등장하는 분들이 계셨다. 여름 무렵에는 작지만 이상하게도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를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오셔서 파시는 할머님과 어느 날, 갑자기 샛노오란 병아리를 들고 찾아오셔서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셨던 할머님
두 분 모두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동심을 이용해서 콧물 묻은 돈을 목표로 장사를 하신 분들이지만, 그 어떠든 내게는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이들은 병아리 할머니(우리는 병아리 할머니라 불렀다.)로부터 산 병아리를 잘 키워서 지금은 암탉이 되어서 매일 계란을 낳고 있다거나(지금 생각하면 뻥이 분명하다, 이런 병아리들은 대부분 수놈이니까.), 아니면 닭으로 키워서 가족들이 그 녀석을 잡아서 닭볶음탕이나 백숙을 해 먹었다든가 하는 소문을 흘리고는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병아리 할머니보다 더 사기성이 농후한 녀석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었는데, 그때는 마냥 신기하고 '나는 왜 저렇게 못하지.'라는 부러움과 시기가 가득하기도 했던 나이였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나의 병아리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봄에 초등학교 정문에서 데려온 녀석이었다.
한 마리당 100원씩, 총 500원에 나는 다섯 마리를 조그만 상자에 넣어서 데려왔는데, 다섯 마리 모두 어느 녀석이 가장 예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고 귀여웠다.
삐약삐약 거리면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신기해서 손바닥 위에다가 올려놓고 보기도 하고, 방 안에 풀어놓았다가 부모님한테 혼나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요 귀여운 생명들이 내게 주는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참고로, 우리 부모님은 매우 엄격하셨는데, 그때 내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그런 적 없다고만 대답하시지만, 병아리로 인해 내가 입었던 상처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부모님이 내게 상당히 엄격한 분들이었다는 상처로도 남았다.
한 마리에 100원...이라는 생명의 값어치가 지금 생각하면 참 터무니없지만, 그 당시에 내게 돈 100원은 거금이었고, 거금을 들여서 입양해 온 녀석들이기에 모두 다 쑥쑥 자라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며칠 되지 않아서, 대부분의 다섯 마리 중 세 마리가 세상을 떠나고 오직 두 마리만 남아서 서로 오누이처럼 삐약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요 두 녀석마저 죽어버리면 무척이나 슬플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나는 최대한 밥도 잘 주고 물도 충분히 주며 애지중지하면서 두 녀석을 잘 보살폈으나, 그 며칠 후에 한 녀석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내게는 오직 한 녀석만 남게 되었다. 네 마리를 떠나보냈다는 슬픔보다 이제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애착이 더 커서 내게는 그 녀석만은 다 클 때까지 내가 지켜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녀석이 건강한 지부터 살피고는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일제 시대에 지었던 한옥으로 나무 거실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방이 있고, 다시 마당을 가로질러 방이 또 있는 구조였는데, 거실 문을 열고 나오면 다시 마루가 있고, 그 마루에서 신발을 신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마루는 집의 끝까지 쭉 연결되어서 그 밑으로 공구나 기타 보관할 것들이 있으면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 번은 병아리 요 녀석이 그곳으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기에 봤더니, 그곳에 죽어 있는 작은 날곤충들을 먹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신기해서 가만히 보고 있기만 했는데, 그것이 병아리가 죽게 된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날 벌레들이 죽어있던 이유는 꿈에도 몰랐지만, 그곳에 누군가 살충제를 강하게 뿌린 것이 원인이었고, 병아리는 그 살충제로 죽은 벌레들을 먹으면서 살충제가 점점 몸 안에 축적되었을 것이니, 그 작은 몸에 그것을 감당할 수가 있었겠는가.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마루 밑의 공간을 몇 번 드나들던 병아리는 며칠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방의 한편에서 죽어있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을까. 내 돈 500원이 다 사라진 것이 서러웠을까. 아니면 마지막 남은 한 녀석에게 애정을 쏟았던 것이 아까웠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는 죽어서 다시는 삐약삐약 거리면서 걷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녀석의 작은 몸뚱이가 가여워서였을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다 합쳐진 복합적인 감정에서였을까.
그 작은 녀석을 내 두 손에 올려놓고 거실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그치고 싶어도 그칠 수 없었고, 지쳐도 지쳐도 눈물이 계속 나왔다. 마치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인 것처럼, 나만 아니면 더 살 수 있었는데 내가 죽인 것처럼 느껴져서 수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못난 놈, 그깟 병아리 한 마리가 죽었다고 그렇게 울다니, 지 아비가 죽어도 울지 않을 녀석이... 그만 울어!!"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아버지는 병아리를 좋아하지도 않으셨고, 더더군다나 내가 그렇게 울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강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마음이 한없이 연약한 사람이 될까 봐, 염려하셨던 것일까...
그렇게 혼내는 아버지가 더 미웠고, 몇 번을 더 혼나고서도 진정을 못하고 그 후로 며칠 동안 눈물을 찔찔거렸던 기억이 선하다.
몇 년이 지났을까, 신해철과 "넥스트"라는 그룹이 "날아라, 병아리"라는 노래를 발표했을 때, 나는 오히려 울지 않았다. 아마도 신해철의 노래보다 먼저 겪은 나의 경험으로 인해 신해철의 노래가 내 가슴을 할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생명은 여지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죽음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되풀이되는 나만의 질문이다. 나는 수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아픈 동물들과 마주하게 되었지만, 솔직하게 나는 수의사가 될 자신이 없다. 작은 생명이 죽음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보호자들이 겪을 아픔을 오히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일지도...
나의 반려견 유키도 어느새 "열 살"이 되었다.
비록, 2~3년 전만 해도 그리 느껴지지 않았던 "유키"의 노화가 올 해부터는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다.
때때로, 이 녀석이 나를 떠나게 되면 그때는 또 얼마나 슬퍼할지 나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동물을 치료하는 수의사가 될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내가 그 녀석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로가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이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병아리를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그 녀석과 하게 될 이별을 알고 있었고, 나의 반려견과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미리 이별을 알고 있었기에 녀석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짠했는지도 모른다.
병아리가 떠난 이 후로, 나는 더 이상 "죽음"이나 "헤어짐"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다. 나와는 전혀 거리가 먼 곳으로 더 이상 이런 이별로 아픔을 겪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나 나는 다시 그 아픔을 수없이 겪어야 할 입장이 되어서, 세상에 서게 되었다.
작은 병아리 한 마리가 내게 남기고 떠난 생명의 무게가 나를 이 길로 인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그 작은 생명이 삐약거리며 내 주위를 돌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2020-06
글 HARU
사진 Lovepik
지금도 종종 나의 병아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 옆에서 잠자고 있는 "유키"를 바라본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따스한 체온을 갖고 있는 생명들이 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