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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블루 Feb 21. 2020

타인의 꿈을 위해 산다는 것

은퇴한 재일교포 축구선수 안영학이 바라는 삶 

특별한 계획 없이 회사를 퇴사하니 모든 게 막막했다. 많은 이들이 전화를 해 "넌 다 계획이 있겠지?"라고 물었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생계를 꾸리는 데 도움을 줄 사람도 절실했으나 가장 만나고 싶었던 이는 다름 아닌 재일교포 축구선수(정확히는 전 선수) 안영학이었다. 앞으로 열 유튜브 채널에 쓸 첫 영상을 촬영하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보다도 그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2007년 재일교포 기자 신무광 선배를 만나고 이어 거의 동년배인 하종기를 만났을 때 새로운 세상을 연 느낌이었다. 2015년 연변FC를 이끄는 박태하 감독을 취재하러 재중 동포(조선족)들이 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포'라는 단어와 동포들의 삶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고,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다. 존재 자체를 아는 것과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 독립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본능적으로 다시 한 번 충격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경계인으로 40년 넘게 산 사람, 성공한 후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 조선이라는 국적(조선적)을 유지하는 남자, 일본은 이미 긴 연휴에 들어간 연말(그것도 주말)에도 무급으로 후배들을 가르치러 아침부터 나선 전 선수를 만나고 싶었다. 안영학은 현실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사람이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일단 아이들에게 인사 한 마디 해주세요


안영학은 보자마자 가장 어려운 부탁을 했다. 줄지어 선 아이들 앞에서 "한국에서 온 아무개입니다. 여러분과 안영학 선수를 취재하러 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어색하게 말했다. 안영학은 축구부 감독과 코치 그리고 자원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러 온 일본 축구선수(인도슈퍼리그로 떠나기 전 하루 전에 학교를 찾았다)까지 소개한 뒤 운동장으로 갔다. 녹색 그라운드가 아닌 흙바닥에서도 중학생을 상대로 안영학은 최선을 다했다. 

하프타임에 전술판을 가지고 설명하는 안영학

연습 경기 전반전이 끝난 뒤, 안영학은 내가 보고 싶었던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열정적으로 전반전 경기에서 나온 문제점을 설명하고 후반전 계획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우리말과 일본어를 썪어가며 말하는 안영학에 집중했다. 마치 우승컵이 걸린 대회 하프타임처럼, 그렇게 안영학과 아이들은 알차고 뜨거운 15분을 보냈다. 


연습 경기를 마치고 점심을 함께한 후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했다. 안영학은 처음에는 카메라를 매우 어색해했으나 5분 정도 지난 후에는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어떻게 은퇴하게 됐는지, 은퇴 후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산아이파크와 수원삼성에서 보낸 생활은 어땠는지, 평양으로 날아가서도 남북전('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을 보지 못한 기분은 어땠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안영학이 가장 신중하면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말한 대목은 '꿈'이었다. 안영학은 프로축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고, 북한 대표팀 소속으로 뛰었기에 K리그에서 뛸 수 있을지는 더더욱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의 꿈을 묻자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았다. 

조선학교를 방문한 혼다
개인적인 꿈은 없어요. 저는 이미 꿈을 다 이뤘습니다. 후배들 꿈을 응원하고, 후배들의 꿈을 돕고 싶습니다. 후배들의 꿈이 이뤄지는 게 제 목표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저 수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영학은 이미 이 말을 증명했고, 지금도 증명하고 있다. 안영학은 최근 일본을 넘어 한국까지 놀라게 한 적이 있다. 2018년, 안영학 초대로 일본 슈퍼스타 혼다 게이스케가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를 방문했다. 혼다는 조선학교 학생들을 응원하며 "절대 꿈을 잊지 말아달라"라고 말했다. 혼다는 월드컵을 마치고 바쁜 와중에도 학교를 방문했다고 한다.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도 방문했다. 안영학은 수원 시절 은사인 차 전 감독에게 학교 방문을 요청했고 ,차 전 감독은 흔쾌히 학교를 찾았다. 그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부모님들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차 전 감독님을 봬려고 회사에 휴가를 낸 분들도 있었으니까요. 오셔서 너무 좋은 말씀을 많이해주셨습니다. '나도 어려운 가운데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니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요. 정말 감사했어요"라고 말했다. 


안영학은 자신이 지닌 사회적인 영향력을 계속해서 아이들을 위해 쓰겠다고 말했다. 유명한 사람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꿈과 도전을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길 바랐다. 

학교를 찾아 아이들과 만난 차범근 전 감독
후배들이 월드컵에 나가고 싶다. 유럽에 진출하고 싶다. 그런 꿈을 제가 서포트해주고 싶고, 실현해주고 싶습니다. 그게 제 역할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안영학과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요코하마 역으로 걸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구체적인 답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니지만, 더 모호해졌다고 해야하나. 자극은 확실히 받았다. 내 꿈이 아닌 내 한 순간의 편의가 가장 우선시되는 시대에 타인의 꿈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안영학처럼 살 자신은 없지만, 내 꿈이 누군가의 꿈이나 편의를 침해하지 않게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실제적인 지침을 얻지는 못했지만, 생각이 어지러워질 때 볼 글과 영상은 얻었다. 2020년, 계속해서 '나도 누군가의 꿈을 응원하고 도와주면 또 다른 꿈이 생기지 않을까?'라고 자문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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