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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블루 Mar 21. 2020

여러분이 잘 지낸다면, 저도 잘 지냅니다

<라틴어 수업>을 읽고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영어 원어민 선생님이 생겼다. 영어 이름을 기억나지 않고 한국 이름은 민수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 교포였다. 당시만해도 반에서 영어를 가장 잘해서 “여차 친구 있나요? 우리 영어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해서 영어 선생님에게 레이저 처방을 받은 기억이 있다.  


한동일 선생이 쓴 <라틴어 수업>을 읽고 원어민 선생님이 생각난 이유가 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야?”라고 물은 뒤 보기를 줬다. 4지 선다형이었고 예는 아마 나, 가족, 친구, 돈이었던 것 같다. 나를 비롯해서 80% 정도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족을 선택했다. 그 선생님은 자기는 ‘나’라고 말했고 우린 ‘이기적이다’라는 눈길을 보냈던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가족이라고 답하는데, 나도 가족 안에 있어. 내가 없는데 가족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다른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무엇도 중요할 수 없는 거야. 한국에서는 ‘우리’라는 말을 정말 좋아하는데 우리도 내가 있어야 성립하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봐.” 


대충 이런 말(물론 한국어로)을 했다. 충격이었다. 1980년대 초반 그리고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거의 가족이나 내가 아닌 다른 것을 골랐을 것이다. 어렴풋이 우리라는 개념이라는 게 허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에 수잔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을 읽으면서 이 당시 일을 다시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아닌 우리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인 것도 아니고, 좋은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오직 나만 중요한 ‘이기적인’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관계라는 게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생각은 했다.  


<라틴어 수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을 돌아보게 됐다. 내가 중요하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한 게 아닌가라고 자문했다. 라틴어를 공부하고 로마법을 전공한 저자는 라틴어 표현과 그 표현을 만들어낸 시대상을 이야기하며 계속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해서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글은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하다.  

편지로 친교를 했던 로마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부분에서 ‘우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로마인들은 편지를 시작할 때 “당신이 잘 지낸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라고 쓴다고 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런 나도 당신이 잘 지내기에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좋은 관계들이 살아가는 데 힘을 준다는 걸 경험하고 있다. 성경에서 예수가 말한 “우리 안에 천국이 있다”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우리 사이에 천국이 있다”라는 표현이라고 한다. 관계는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쓰지만, 과연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남아 있는지 돌아봤다. 나도 그런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면 관계를 더 잘 돌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건 꼭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한 개인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로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름을 인정한다면서도 다른 이들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었나. 자문하게 됐다.  


이 책에서 이 부분만 기억에 남은 건 아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라는 문구도 가슴에 새겼다. 저자가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하며 꺼낸 표현이다. 장점과 단점은 돌고 돌며, 지금의 장점이 나중에는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성공한 감독이 두 번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가 이 표현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건 변하는데 한 번의 성공에 도취되면 그게 자신을 얽어 맬 수도 있다.  


로마인들은 그 표현을 편지 처음에 썼지만, 나는 그 말로 글을 맺으려 한다.  


“여려분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덕분에 저도 잘 지냅니다. 이 전염병이 지나가면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합시다. 그동안 감사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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