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헤어진 다음날.
모래 같은 밥알들을 삼키며 출근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나에겐 모든 게 달라졌는데
온 세상이 뒤집어졌는데
돈을 벌기 위해 어김없이 일을 해야 했다.
일상은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흘러갔다.
울 시간이 없어서 눈물을 꾸역꾸역 참으며 버스를 타는데
창문에 생기는 물방울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이 내려주는 빗줄기를 보며
감사했다.
내가 울 때 세상은 함께 울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울 수 없는 나 대신 울어주는 것 같은 하늘이 고마웠다.
하늘이 맑았다면 얼마나 비참했을까.
난 참 운이 좋은 편이구나. 감사할 게 많은 사람이구나.
덕분에 울지 않고 출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타이밍이 잘 맞지는 않는 법이다.
일주일간의 파리 여행에서 매일 우산을 가방에 가지고 다니던 우리는
드디어 마지막날,
오늘만큼은 우리도 파리지앵처럼 가랑비쯤은 맞으며 가벼운 몸으로 돌아다녀보자! 란
야심 찬 생각으로 우산을 버리고 나섰다.
여행 중 2,3일 정도 비가 오긴 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 정도였고
우산을 쓰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파리 사람들은 웬만한 비는 다 맞고 다니는구나,
나도 여기 온 김에 파리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마지막 날은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고 5시쯤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슬슬 5시가 될 무렵 우린 만날 장소를 카톡 하고 ‘그때 보자’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마쳤다.
그리고 툭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부터가 이전의 비와는 달랐다.
무겁고 굵은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고 곧 여름철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인지라 에펠탑을 한 번 더 보러 갔던 난 근처 작은 문 아래 서서 비를 피했다.
친구를 만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하는데
30분은 걸어가야 한다.
마침 지나가는 흑인 남성분이 우산을 사라며 나에게 슥하고 검은 우산을 내민다.
순간의 고민.
'어차피 곧 그칠 텐데 보나 마나 비싼 저 우산을 사야 할까.’
짐이 많아져서 하나라도 더 줄여야 하는 여행마지막 날이었다.
‘5분이면 그칠 텐데.’
결국 난 no thank you를 외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고 마음만 바빠졌다.
친구에게 보이스톡을 걸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받지 않는다.
원래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기로 했지만 이대로는 무리다.
일정을 변경하거나 취소해야 한다.
카톡을 보낸다.
‘일정 취소야. 숙소에서 만나자.’
로밍이 아닌 유심칩을 사갔기 때문에 서로 톡으로만 연락하던 우리는 카톡이 때때로 잘 작동하지 않기도 했었다.
그리고 비가 오는 그때 카톡은 불통이 되었다.
아무리 보이스톡을 걸어도 묵묵부답.
데이터도 잡혔다 끊겼다가를 반복했다.
친구도 중간 지점까지 오려면 30분을 걸어와야 한다.
‘내 카톡을 봤을까?
못 봤어도 설마 이 비를 뚫고 오고 있을까? 알아서 잘 숙소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데이터가 안되니 내가 보낸 카톡을 읽은 건지 아닌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이래서야 비를 맞고 중간지점까지 가자니 친구가 숙소에 갔을 것 같고
숙소에 가자니 카톡을 못 봤다면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중간 지점은 알렉산드로 3세 다리.
비를 피할 곳은 없다.
결국
조금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타 난 부지런히 걷기 시작한다.
제발 이 비가 그치기를 바라면서.
버스도, 지하철도 없다. 택시를 타기엔 돈이 없고.
아 불쌍하여라
참 얄궂게도 그렇게 비를 맞고 다니던 파리 사람들은 다 빗방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산을 피더라.
그동안 들고 다니지도 않던 우산들은 어디서 난 건지.
에구 누굴 탓하랴.
빗줄기에 핸드폰이 상하지 않게 잘 넣어놓고 부지런히 걷는다.
10월의 바람은 차갑다. 비 젖은 몸에 바람이 부니 감기 걸리기 완벽한 조건이다.
10분을 걸으니 비가 가늘어진다. 희망이 보인다. 저쪽 하늘이 맑아 온다.
그리고..
마침내 보이는 알렉산드로 3세 다리.
비도 거의 그쳤다. 친구에게도 그제서야 연락이 닿는다.
5분이면 도착한단다. 아, 이곳으로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와 감개무량의 그 순간.
저 멀리 황금빛 동상이 보이는 곳에 무지개가 걸린다.
아.. 이래도 되는 거야.. 정말..
너무 감동이잖아.
그토록 가고 싶었던 파리에서의 무지개라니.
너로 인해 순식간에 행복해진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지개는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인생사 힘들고, 당장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좋은 것들이 있을 수 있을 거야.
날 힘들게 한 이 비의 끝에 무지개가 기다리고 있었듯이.’
몸으로 느낀 감정은 마음 깊숙이 새겨진다.
그리고 우린 다리에서 무사히 재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멋진 야경을 맘껏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