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은 버려야 할까?

by likeu



하얗던 구름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가득 찬 물입자들이 비로 내리기 시작한다


마음에 하나둘 쌓인 감정들로 무거워진 날

빗 속을 걸어본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어느새 발등까지 차오른 빗물은 예상과 달리 따뜻했다.


‘더 잘할 순 없었던 걸까?’

떠오르는 후회와 질책 속에서

‘너도 힘들었잖아.’

날 감싸는 목소리가 들린다.


연민.

깊은 곳에서 이대로 둘 순 없다는 듯 날 옹호하려 목소릴 낸다.

조금 부끄러워진다.

아이 같은 자기 합리화는 구질한 변명이다.

이런 건 버려 버릴까.


요즘 시대엔 흔히 보이지 않는 연민이란 단어가 등장한 쇼츠가 생각난다.


사업 아이템에 투자받고자 심사위원들 앞에 서는 한 남자.

그는 심사위원들에게 거절당하자 억울한 듯 조금은 격앙된 표정으로 자신이 바쁜 농구선수 생활가운데서도 어떻게 코딩을 만들었는지, 시합 끝나고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쉬지 않으며 얼마나 노력했는지 쏟아냈다.


결과가 궁금해진다.

심사위원들은 과연 이 남자의 노력에 감동을 받을 것인가?

혹은 그의 의지를 높이사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인가?


심사위원은 말했다.

“자신을 연민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 그런 일들을 겪어오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남자는 그 한마디에 말없이 돌아섰다.


드라마 같은 반전이 없던, 차가운 그 말이 좋았다.

심사위원이 되기까지 겪었을 그들의 또렷한 현실을 보여주었기에.


연민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불필요한 것을 잘라내는 칼과 같은 동정 없는 세상도 살아가야 한다.

연민이 우리에게 이겨내지 못한 현실에서 도망쳐 숨을 구멍일 뿐이라면

그것은 몸은 다 드러난 줄도 모르고 눈감은 채 머리만 가린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연민에 대한 사실이 그것 하나 일까?


모든 생명은 자신만의 삶을 써 내려간다.

취업하나 만 보더라도 이 치열한 사회에서 전문성을 쌓아 직장을 갖기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다.

그래도 노력했으니 “꿈을 이뤄 마침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책을 덮듯 인생이 끝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계속된다.

삶은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극복이란 단어가 필요할 정도의 노력과 힘을 요구한다.


‘나’는 내가 기울인 노력과 눈물을 보았다.

남들은 모를 마음 하나, 나조차 지나쳤던 마음까지 가슴 어딘가에 꽂혀있다.

자기 연민은 그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이 마음이 내게 줄 수 있는 게 자기 합리화와 비겁함 뿐인가.


아니라 말하고 싶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에 질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길 바란다.

목숨을 부지하는 게 아니라

하루 중 몇 분, 몇 시간 정도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세상에게, 나에게 지고 나면 올라오던 실패의 찌꺼기들.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 ‘난 내가 너무 싫어’라는 자기부정.


현실적 감각란 이름으로

나를 부인하는 감정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면,

내게 다시 움직일 새로운 동력이 되어준다면

좋다.

자기부정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조금 생각해 보자.

포기하고 싶은 순간 연민의 문을 열어

자신에게 도망칠 공간을 허락해 보자.


나를 삼킬 듯 커져가는 후회와 부정 앞에서 연민은 법적근거를 들어 날 변호해 준다


‘왜 해내지 못했어! 그것밖에 못해!‘라는 쓰라린 힐난 앞에서

‘사실 충분히 힘들만했단 거 알아.’

‘네가 무슨 일을 겪었고 느꼈는지,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그게 지금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해’.

하고 삶을 투명하게 인정해 준다

그렇게 안아주면

맘이 놓인 듯 개운하게 울어버린 마음이

신기하게도 ‘이제 일어서 보고 싶어’ 하고 빼꼼히 고개를 든다.


그렇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때

우리는 다시 현실을 마주하고 설 힘이 생긴다.


누군가의 따뜻함이 필요한 날들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순 없는 이곳에서


내가 그 ‘누군가’가 되어 자신을 재생시켜 준다면

자기 연민은 나를 겁쟁이가 아닌 다시 일어선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연민을 함께 시련에 맞서 나갈 충직한 벗으로 만드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리의 몫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지 않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