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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바람처럼 Apr 20. 2018

마흔의 임신_2

감정의 굴곡

난임 병원을 다니면 많은 감정의 굴곡을 느끼게 된다.


여성의 경우, 강제로 호르몬을 조절하는 치료로 인해 생리 전 증후군보다 심한 감정 변화에 휩싸인다. 남성의 경우도 정액을 채취하는 과정이 굴욕적이라 하여 처치실이 '굴욕의 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난임치료는 다른 질병 치료보다 나의 부족함, 불가능함이라는 의미와 연관되어 기분을 다운시킨다. 대부분의 중요한 치료 단계마다 가슴에 솟아오르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억누르고 시간에 딱 맞춰 치료과정에 적극적인 참여를 요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


자연임신 시도의 경우, 배란일에 맞추어 의사가 알려주는 일정에 관계를 해야 한다. 이것을 숙제라고 돌려 말하기도 하는데, 단어가 주는 의무감, 압박감에 그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공적 결과(임신테스트기의 두줄을 보기 위해)를 위해 감정보다 이성이 앞설 수밖에 없다.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배란일이 아니면 관계 자체를 피하게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남편과 미묘한 심리전이 생기는데 어쩔 수 없이 서로 생채기가 난다.


명백한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 목적성이 더 커졌을 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 같은 것이 생겨났다. 희열감이 아닌, 목적지에 다다른 안도감으로 끝난 밤은 묘하게도 슬펐다. 슬픔은 말을 하지 않아도, 눈을 감아도 전해진다. 저절로 서로에게.


테스트기 수 십 개를 쌓아두고 임신 테스트를 했다. 처음에 희망과 기대로 시작한 테스트는 서서히 실망감으로 변해갔다. 매달 반복되는 조바심과 좌절감을 화장실 한 켠에서 혼자 감내해내야 했다. 한 줄이 나온 테스트기는 남편에게 보여줄 것도 없이 쓰레기통 행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는 여자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고, 임신한 여자들의 얼굴에서는 우월감을 찾아냈다. 임산부의 젖혀진 허리와 볼록 나온 배가 자랑하는 듯하여 얄미웠다. 상기된 표정에서 느껴지는 설렘이 부러웠다. 이내 부러움을 들킬까 봐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다음 생리를 기다리는 나는 한 달만 사는 임신 기계가 되어가는 듯했다. 호르몬의 주기처럼 감정에도 주기가 있는 듯했다.


병원 어디서도 기다림과 실망감의 주기적 반복으로 약해진 마음을 보듬고 안아주는 이는 없었다. 기계적으로 진료 예약을 하고 처방을 내리고 계획을 하지만 마음에 대해 물어봐주지는 않았다. 아이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편과의 관계, 우리의 존엄성이 더 소중했다. 건강한 부부가 건강한 부모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서는 더 이상 못 하겠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과배란 유도로 몸은 지쳤고, 마음은 갖가지 부정적 감정으로 어두워졌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마음은 가라앉았고 병원 가기를 중단했다. 지금도 늦었다고, 서두르라는 의사의 말은 나를 붙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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