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걷기 여행_1

by 물처럼 바람처럼

2015년 5월 1일부터 5월 4일까지 3박 4일간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일상에 돌아온 후에도 여운이 꽤 오랫동안 남아 있다. 회사에서 PC 화면을 보면서도 푸르른 녹음이 그리웠다. 이 좁은 사무실에서 이렇게 아등바등 스트레스받으면서 살기보다 지리산 자락에서 고사리 농사지으면서 살면 어떨까? 하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나. 보고서에 시달리는 지금도 지리산 계곡의 물은 흐르고, 숲은 숨을 쉴 텐데, 다시 가고 싶다고, 또 가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 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85km의 장거리 도보길로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마을길 등을 환형으로 연결한 길이다. (http://jirisantrail.kr)

전체 22구간 중에 남원에서 함양까지 이어지는 4개 구간을 걷기로 선택했다. 1구간 주천~운봉(15.7km), 정령치 ~ 바래봉(12.5km), 3구간 인월~동강(19.3km), 4구간 동강~금계(11.5km) 까지 약 60km와 2구간 운봉~인월은 바래봉 철쭉제를 보기 위해 생략하고 정령치~바래봉으로 대체했다.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 여행기를 읽고 나서 인생을 함께 할 사람이 생기게 되면 꼭 한번 같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장거리 도보여행 도전,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순례길이라는 신성함에 막연한 동경이 있었나 보다. 완주하는데 한 달이 더 걸리는 800km 나 되는 길을 여행할 시간도 체력도 안되기에 마음을 접었었는데 지리산 둘레길이라도 걸어보자며 계획했다.


힘든 여정 속에 내던져졌을 때 서로의 솔직한 모습을 직시하면서 일종의 인생 연습을 해보고 싶었고, 다이어트까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했다.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밥 먹듯이 말다툼을 하고, 걷다가 화해하고, 생리현상까지 자연스러워지는 솔직함을 발휘했다. 하루에 20km를 걸었는데도 다이어트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낮에는 막걸리를 마시며 쉬어가고, 밤에는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했기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지리산 둘레길 걷기 여행은 지금까지 내가 했던 여행의 패러다임을 깼다.


여행을 가기 위해 관광지를 검색하고 괜찮은 콘도나 펜션을 예약하기 위해 수십만 원을 지불했다. 깨끗한 숙소와 편리한 교통이 여행의 가장 높은 우선순위였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 예약한 숙소에 머물고, 다시 자동차를 타고 인터넷에서 봐 두었던 관광지를 구경하고, 블로그 맛집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을 눈과 입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여행의 중심이었다. 자동차 안에 갇혀서 관광지에서 관광지로,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여행을 했다. 세상과 나는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움직였고 단절되어 있었다.


둘레길 걷기 여행은 그 점과 점들이 내 발걸음을 통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여행이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길 자체가 과정이자 목적이다. 예전 같으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자동차 안에서 스쳐 보냈던 풍경들이 모두 그 자체로 아름다운 여행지였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사, 웃음에 익숙해졌고, 기대하지 않았던 고마운 사건들이 생겼다. 깊은 숲 속에서 마주 오는 사람에게 일말의 적대감도 갖지 않고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고갯길을 헐떡거리며 올랐을 때,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수고하셨어요. 힘드시죠?' 라며 응원을 보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끼리 생겨나는 일종의 동지의식 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구간을 걷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4구간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아버지와 아들을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밥상이 하나밖에 없어 같은 밥상에서 함께 라면을 먹게 되었다. 오가면서 인사를 주고받은 터라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중3짜리 아들은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여행을 시작한 듯했지만 얼굴에 뿌듯함이 엿보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견해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스스럼없이 낯선 이와 밥상을 공유하고 마음의 빗장을 풀면서 뭔가 이완된다는 느낌이 편안해 좋았다. 둘레길 걷기 여행의 매력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그리고 이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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