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가 없거나, 배려가 없거나
휴직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시간이 많아졌고, 회사 다닐 때는 해보지 못한 것들을 시작해 보고 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시작한지는 어느덧 석달이 되어가고 최근에는 탁구와 미싱을 시작했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을 하려면 원장이나 관장과 인사를 하고 등록을 해야 한다. 자연스레 내 개인정보를 노출할 수 밖에 없다. (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넘어야할 산이다. )
이 과정에서 그들 입장에서는 평범하고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질문들이 나에게는 폭력적으로 들릴 때가 있다.
“등록하시면 자녀분들은 무료로 탁구장 이용가능 하세요. 애들이 몇이에요?” 라던가.
“아이는 몇 살이에요? 옷 만들어 주면 좋아요.” 라던가.
친절한 얼굴로 웃으면서 건네는 말들이 참 아프다. 노처녀에게 결혼은 하셨냐고 묻는다던가, 취준생에게 무슨 일 하냐고 묻는다던가, 재수생에게 어느 대학교 다니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이 모든 질문을 어쩜 한 인생에 다 겪고 살 수 있는 걸까. 나도 새삼 놀랍다.
“아이는 없어요.” 라고 말할 때 내 표정을 나도 보고 싶은데, 실은 표정 관리를 엄청 신경쓰는 거다. 최대한 쿨하게. 마치 고의적인 딩크족이고, 인생 즐기며 사는 것처럼. 질문자가 무안해하거나 당황하는 걸 보는게 더 싫기 때문이다. 이런 연기도 좀 익숙해졌나 싶었는데 요즘 연타로 마주하다보니 나도 살짝 예민해졌나보다.
6개월 동안 해외 파견 근무를 했던 때가 기억난다. 서른 넷의 나이에 미혼이었던 나는 늦어지는 결혼에 대해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거기서 가장 좋았던 것은 한국의 ‘평범한’ 또는 ‘보편적인’ 삶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던 것이다. 이쯤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아니면 ‘왜 아직도?’ 라는 눈빛으로 호기심을 갖고 이유를 캐보려 하거나 구하지도 않은 조언을 던지는 사람이 없어서 숨쉬고 살 만 했다.
내가 이렇게 사니까, 대다수가 이렇게 사니까 이 사람도 그렇겠지? 라고 건너 짚어서 던지는 질문이나 조언은 무례하고 폭력적이다. 질문자의 예의나, 배려심을 의심하게 만든다. 질문하는 저 사람 주의에는 늦게까지 미혼인 사람도 없고, 늦게까지 아이가 없는 난임부부는 하나도 없는 걸까.
취업이나 결혼 관련해서 ‘눈을 좀 낮춰.’ 라고 하거나 ‘그 때가 좋을 때다. 그냥 평생 신혼으로 살아’ 라고 하는 말은 대체 머리에 생각이란 걸 탑재하고 있는 건지 실로 궁금하다. 도대체 남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거나, ‘참 굴곡없이 쉽게 산 인생인가보다’싶다가도 이렇게 생각하면 같은 부류가 되는 것 같아 이내 접으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내가 과대망상인가 싶기도 하다. 사람이 어떤 일에 결핍을 느끼다 보면 그 부분의 촉수가 발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하게 살기가 가장 어렵다는 대한민국에서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란 것이 있다. 늦어지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말 한마디 건넬 때 배려와 예의가 담겼으면 좋겠다. 꼭 필요한 질문이라면 “실례가 안된다면” 이라는 말이라도 붙여서 했으면 좋겠고 굳이 안해도 문제가 없다면 호기심을 꾹 참고 넘어가주면 좋겠다. 오늘 읽은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 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한국을 영영 떠나고 싶어지는 느낌을 자주 받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