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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바람처럼 Nov 30. 2018

마흔의 임신_18

주도적인 삶과 출산에 관하여

돌아보면 그리 주도적으로 살았던 적이 없다. 때가 되어서, 다들 그렇게 하니까, 떠밀리듯이 살아온 것도 같다. 그렇게 대학교를 입학하고, 취직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그렇게 또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려나? 


담당 간호사님으로부터 출산 계획서 숙제를 받은 지 3주가 넘어간다. 

막연히 나는 노산이니까 의료진의 적극적인 개입과 안전한 출산을 지향해 왔다. 

군대에서 목숨 잃을 뻔한 이야기 하나 가지지 않은 남자가 없듯, 주변의 지인들 모두 힘든 출산을 이야기했다. 콧구멍에서 수박이 나오는 것 같다, 지옥을 맛보았다, 회음부 절개가 제일 아팠다, 아니다 꿰맬 때가 제일 아팠다. 그녀들을 통해 들은 출산은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듯이, 끊임없이 무통과 진통제를 요구해야 한다며 진통을 최소화하는 비법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산부인과 문화원에서 출산 계획서 강의가 있었다. 배경지식이 없이 들었기에 강의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의료진에게 맡기고 안전한 출산을 하겠다는 내 생각에 큰 변화는 없었다. 

며칠 후 출산 관련 책과 영상을 찾아보다가 몇 년 전 출산한 친구의 페이스북 피드가 떠올랐다. 첫째는 출산병원에서 자연분만으로, 둘째는 자연주의 출산을 한 친구였다. 

의료진의 적극적 개입으로 (보편적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방적으로) 진행된 첫째 출산의 기억을 회상하며, 둘째는 본인이 계획한 대로 출산을 하겠다는 출산 계획서가 아직 그녀의 페이스북에 남아있었다. 처음 그 출산 계획서를 보았을 때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출산을 앞둔 지금 보니 과연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아닌 내 '친구'가 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에 작은 용기가 생겨나면서 조금씩 나도 자연주의 출산을 검색하고 있었다. 


출산은 무섭지 않다. 진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긍정적 상상을 하라. - 출산 강의 노트 


엄마의 출산에 대해 들었다. 외할머니가 산파가 되어 집에서 직접 나와 동생을 받으셨다고 했다.

"새벽에 소변을 보는데 이슬이 비치는 거야. 집안일 다 끝내 놓고, 저녁해서 앉혀놓고, 아빠한테 할머니를 모셔오라고 했어." 

우리를 낳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고통을 상기하기보다 자랑스러워 보였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산부인과 출산과 가정 출산의 과도기쯤에 있었다. 집에서 태어나서 출생 시 몸무게를 모른다는 내 이야기를 신기해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괜히 부끄러워 이후로는 입을 다문 적도 있다. 

그런 시기를 지나 지금의 나는 자연주의 출산이 엄마의 출산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엄마가 한나절 동안 얼마나 용기 있게 진통을 감내하셨는지, 평화롭게 가족들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얼마나 복된 아이였는지 새삼 깨달았다. 차가운 출산이 아니라 따뜻한 출산. 산모와 아기가 주체가 되는 출산. 

나중에 나도 뱃속 아이에게 너와 내가 얼마나 용기 있게, 서로 도와가면서 만났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출산 계획서를 작성하고 있다. 

출산을 두려움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 혼자만이 아닌 가족의 축제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보고자 하는 한 걸음을 내딛는다. 

누군가에 의해(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계획하는 출산을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주도적인 출산의 경험이 나와 내 아이가 주도적인 삶을 꾸려가는데 밑바탕이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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