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는 나의 강점에 대해서 다뤘다면 이번에는 솔직하게 나의 취약한 부분도 용기 내어 밝히고자 한다. 나는 정말 예민하다. 주변 사람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의아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예민한데 왜 주위에서 못 알아챌까? 나는 주변에 드러내는 예민함은 후천적 예민함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어렸을 때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자랐거나...
태어나면서부터 극도로 예민했던 나는 내가 예민한지 몰랐다. 그저 내가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남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아닌가를 인지하기 전부터 그저 나에게 전해져 오는 자극이나 고통을 처리하기 위해 애쓰면 살았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유년시절을 매우 고통스럽게 지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애쓰며 살아온 것 같다.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모든 요인들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고, 사실상 그에 대한 짜증과 분노도 많이 표출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말이다.
감각에 예민한 내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예민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누군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민감했고, 약간의 표정 변화, 뉘앙스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러한 훈련 덕분에 지금의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사실 지금은 그러한 능력을 매우 잘 활용하고 있어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 능력을 얻기 위해 어린 시절 나는 매우 고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누군가 집에 놀러 온다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 또한, 모두 나의 예민한 감각 때문이었다. 단체 생활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대한민국 교육과정과 사회생활을 거쳐 지금은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어린 시절, 난 외부와 나의 집을 철저히 구분 지었다. 외부에 있던 물건이나 사람은 철저히 오염된 느낌이 들었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결벽증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학창 시절이 너무 괴로웠고, 특히 나와 가까이,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 주로 가족들에게 많은 힘듦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점점 나는 내가 남들과 다르게 예민한 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만 진지하게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깊게 고민하고 해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행동을 지켜보지 않았다. 그때였을까? 난 꽤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나만 예민한 나를 보듬어주면 되었고, 남들의 반응에 그렇게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이 선천적인 예민성이 앞으로는 예민하지말자! 라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부분이라면 어느 누가 예민하겠는가. 난 철저히 나를 훈련시켰다. 겉으로는 예민해 보이지 않는 부분만 더 과장되어 드러냈고, 나의 예민한 부분은 나만 알아챌 수 있도록 숨겼다. 그리고 이런 예민함이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고, 위로하거나 공감해 줄 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그다지 감정적인 동물은 아닌 관계로 말을 부드럽게 한다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특별한 섬세함과 깊은 관찰력으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이것을 알아채는 사람 또한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세상을 섬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구분해 갔다. 예민함의 끝판왕인 나는 섬세한 사람들이 좋았고, 섬세하지 못하더라도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좋았다. 선천적으로 무던하고 무신경한 사람들은 나에게 너무나 폭력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나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왜 내가 그들을 피하는지 모르는 채로 나에게서 멀어졌고, 누군가는 그런 나를 이해해 주면서 곁에 있어 주었다. 예전에는 후자에 대한 감사함 보다는 전자를 피해야 한다는 것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에 대해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나 자신만큼이나 나의 예민성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내가 모든 사람에게 벽을 세우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내 곁에 있어주어 나는 그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어느덧 30살 이상이 되어 난 어느 정도 단체생활과 사회생활에 적응하였고, 내가 일부러 예민성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나를 예민하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세상이 변하여 예민한 인간들에 대한 이해도와 장점이 어느 정도 용인되어 왔고, 난 또한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가끔은 의도적으로 예민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훈련되어 왔다고 해서 내가 더 이상 예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사람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칠 때, 내 예민성은 더 높아지고 난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서 슬기롭게 다스리려고 노력한다. 나는 주로 혼자 여행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혼자만의 힐링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기분 좋아지는 일만으로 해결이 되는 경우는 꽤 가볍게 지쳤을 때이다.
다소 심각할 때는 우울한 노래를 듣거나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 한 번씩 눈물을 쏟아내면서 감정 해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특히 유년시절에 대한 상처가 많은 나로서는 그때 결핍을 건드리는 내용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몰입되곤 한다. 그래서 요즘 좀 걱정인 것은 심각함을 느끼게 되는 날에 대한 빈도수가 잦아지고 무엇을 해도 해소가 되는 느낌이 안 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 나도 모르는 우울함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아무래도 환경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다면 변화를 이루려고 노력할 테고, 그럼 또 다른 시도를 위한 행동력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할 것이 분명한데, 아직까지는 명확한 방향성을 찾지는 못한 채로, 이것저것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면서 방황하고 있다. 생각도 많고 행동력이 많은 나는 머릿속도 몸도 쉬지 못한 채로 계속 돌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긴장성이 높은 상태, 몸이 경직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신호가 다양하게 느껴지고 있고, 저번 글에서 말했던 에너지가 높았던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더욱 몸을 힘들게 굴렸던 상황이 이런 상태를 더 악화시켰던 것 같다. 이제는 내 몸에 휴식과 이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심적으로나 몸적으로나 편안한 상태를 가지는 것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다.
(2024년 10월 현재의 감정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