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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Nov 08. 2024

결벽증 아내와 산다는 것은

서울깍쟁이의 신혼일기(4)

세상에는 여러 강박증이 있는데 나는 세미 결벽증이 있다.

예를 들면, 손을 매우 자주 씻기, 설거지 바로 하기, 침대는 샤워 후 눕기, 어디라도 놀러 가면 청결상태부터 체크하기,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예민해지는 등등 너무 많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나의 결벽증은 주로 엄마의 영향이 크다.

어릴 때부터 공부하란 소리대신 씻어라, 청소해라, 옷 다려 입어라 등등 청결에 관한 잔소리가 더 많았다.

게다가 엄마는 정리전문가 자격증까지 딸정도로 정리정돈을 사랑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커가며 조금씩 결벽증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었다. (아직 옷수납은 어렵다.)


결혼 전 가끔 남편의 자취방을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구석구석 보진 않았지만 나름 깔끔했었고 데이트 때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었기에 남편이 또래 남자들보다 좀 더 깔끔한 편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나의 역프러포즈를 통해 산산이 깨졌다.


서프라이즈 프러포즈를 위해 남편의 당직 끝나는 아침, 비워져 있는 남편 자취방에 방문했다.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침이라 밝아야 할 집안은 암막 커튼으로 인해 칠흑 같은 어둠이 감싸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커튼을 걷히러 직행하는 도중 뭔가 밟혔다. 흠칫 놀랐지만 빨리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거실의 풍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거실 소파엔 언제 입었는지 모를 온갖 옷가지, 테이블에 찌꺼기들이 붙어있는 채로 쌓여있는 컵라면, 다 마시지도 않은 여러 개의 캔콜라, 바닥 군데군데 며칠 동안 청소를 안 했는지 알 수 있는 개수의 속옷과 양말, 주방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 베란다에는 분리를 기다리는 재활용 쓰레기통 등 아주 가관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워 서프라이즈라는 걸 잊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뻔했다. 다행히 바로 자각하고 나중에 프러포즈 다 끝나고 조져주겠어!라는 다짐으로 빠르게 집안 청소 후 남편 맞을 준비를 했다. 성공적으로 서프라이즈는 마치고 남편에게 따져 묻으려 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어물쩍 넘어갔다.


이후 남편의 실체를 알고서는 나의 결벽 레이더가 남편을 향하게 되었다. 특히 사소하지만 손으로 더러운 걸 만지고서 닦지 않고 밥을 먹거나 운전대를 잡거나 내 손을 잡는 등 신경을 건드리는 행동을 하면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바로 여보! 손!이라 외치면 남편은 체념했다는 표정으로 손을 씻는다.


강박증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거나 '아이고 유난이다 증말~'이라며 가족이나 친구에게 한소리 들을 때도 있다. 쉽게 고쳐지면 이미 고치고도 남았겠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강박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터.


그러나 남에게는 강요하거나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


결혼 1주년 식사 때 지난 1년 동안 나 때문에 힘들거나 화난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청소랑 깔끔한 거 조금만 덜했으면 좋겠어~ 그 외엔 없어!'라며 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1년 만에 내 눈치 보면서 힘들다고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노력하겠다며 다짐했었다. (그 이후 드라마틱하게 나아지진 않았지만 체력적, 심리적 여유로울 땐 덜하다.)


우리의 뇌는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와 같다고 인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남편을 고치려기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조금은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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