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안에 내 모습을 싫어해
7주차
어금니 통증 사라짐. 기립성 저혈압 심해짐. 계절학기 종강을 달려가고 인내심도 한계를 달리고 있음. 여름의 우울함이 차오르는 중. 돌봄일기 업로드 못함.
8주차
종강 후 가라앉지 않는 우울함. 침대에서 내려오다 손목에 멍 듦. 호피폴라 2주년 기념 라이브방송에 행복해짐. 가슴 아래 찌르는 통증이 자주, 길게 온다. 들쑥날쑥한 기분에 돌봄일기 업로드 못함.
9주차
룸메와 함께 운동 시작. 건강해지는 기분. 어금니는 아니지만 턱 근육인지 잇몸인지 원인모를 통증 有. 가슴 통증은 이틀에 한번 꼴로 찾아옴. 본가에 내려가서 한의원 진료받기로 결정. 사랑니 발치함. 업로드 불가능.
10주차
한의원 왈 '몸에 열이 뭉쳐서 기흉이 올 수도 있네요. 침 맞고 약 먹읍시다. 생각 최대한 하지말고,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 이뤄질 수 없는 처방. 매복 사랑니 발치 후 고생 중. 돌봄일기 드디어 업로드.
둥근 가슴
오랜만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읽었을 때는 영혜의 꿈이 뇌리에 강렬하게 꽂혔었다. 그땐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에 꽂혀있었다.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나는 괜찮아 –한강 채식주의자 中-
지금은 이 문장에 꽂혔다. 작년 전공이론 강의를 들으며 ‘시선’이 가지는 폭력성에 대해 레포트를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시선으로 존재를 인지하고 인정받지만 ‘나’가 어떤 존재를 ‘너’ 즉 타인으로 인지하는 순간 ‘나’의 시선으로 타인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나’의 시선으로 본 ‘너’는 온전한 ‘너’가 아니라 내 편협한 생각에 갇혀 보이는 이미지란 소리다. 존재가 존재하는 태초의 순간에 단지 ‘바라봄’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고, 고집도 센 인간이라 내 시선 속에 들어간 폭력을 버리지 못한다. 의식적으로 지워내려는 무의식의 폭력을 자각할 때 마다 절망을 느낀다.
벽을 세우는 나라는 반드시 벽과 함께 무너진다.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자연히 주기도 싫다. 내가 한 행동은 언젠가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상처 받은 인간은 갈등을 꺼린다. 갈등의 순간에 들리던 숨소리, 공기, 그때 입은 옷의 촉감과 색, 방의 온도와 상대방의 모든 행위, 심지어 창밖으로 지나가던 광고차량의 노래까지 전부 기억난다. 갈등의 순간이 지난 이후에도 화와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내 세포에 다 새겨진다. 현실에서 도피하려 들었던 음악, 생각, 종이에 쓴 글 전부. 훌륭히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것들은 나의 일상에 불쑥 튀어나와 괴롭힌다.
나 스스로가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아직 나한테 상처 준 사람들한테 사과도 받지 못했는데, 그 사람들은 멀쩡히 잘 살고 나는 이런데 내가 어떻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나.
나는 상처를 입었다는 자체에 수치심을 느꼈다. 겨우 저따위 사람에게 내가 상처를 받고, 그 상처가 너무 아프다는 사실이 더 괴롭게 다가왔다. 그래서 상처를 입지 않았다 여기기 위해 일부러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대상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서부터 시작했다. 가족, 그리고 그때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
일부러 잔인한 말들을(문자 그대로) 골라서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징그러운 것들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상상하고, 욕을 툭툭 내뱉고. 그 행동들이 나를 보호해줄 줄 알았다. 실제로 보호해주긴 했다. 나를 무리에서 끼워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단체로 합심해 따돌림을 시키지는 않았다. 또래보다 컸던 덩치와 굳은 얼굴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나는 철저히 고립되기를 바랐고 고립되었다. 완벽하게 혼자였다.
한번 자리 잡은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주려고 노력했다. 대놓고 하지는 못했다. 그럴 배짱이 되질 못해서. 대신 마음속으로 몇 백번을 죽이고 살려냈다. 심술궂은 쾌감을 느끼면서 자기연민으로 무장하고 거친 표현들만 썼다. 어느 순간 나는 원래 그런 아이가 되었다. 입이 거칠고, 냉소적이고, 따로 노는 아이. 뒤늦게 친해진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민한 주제에 동굴 속에서 끝도 없는 동면을 취하려는 곰’ 같았다고.
다시 돌아와서,
나는 일찍이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상처를 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하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임을 자각하고 있던 거였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가해자일 수 있다고 몰아붙이고 거기서 나오는 자기연민으로 방어하고 버텼다. 이건 좋은 방식이 아니다. 나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시선에는 본능적으로 폭력이 담긴다. 내 손짓, 말, 시선, 그 모든 것에는 누군가가 받을 폭력이 담겨있다. 그것들을 아예 제거할 수 없다면 모든 언어들에 무엇을 담아야할까. 아마도 답은 다 알고 있겠지. 사랑일 것이다. 둥근 가슴, 그 안에서 자연히 느끼는 사랑.
둥근 가슴을 맞닿아 포옹을 전하면 상처 받지도, 주지도 않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