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배움의 기술
영성을 얘기하면서 돈과 성공을 언급하는 서적들이 꽤 많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돈은 중요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결실을 맺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 역시 삶에서 가치 있는 경험 중 하나다. 대단한 성취까진 아니더라도, 마음의 억압된 부분을 자유케 하면 불필요하게 갉아먹던 정신작용이 줄어들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순수하게 몰입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집중된 에너지로 흐름을 타면 분명 전보다 우리 삶이 나아진다는 것은 조금만 시도해 봐도 확인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꼭 마음공부가 돈과 성공을 위한 것이어야 할까?
언젠가 지인의 추천을 받고 구매했던 어떤 책은 반품하기도 했다. 책 반품은 불량 아니면 거의 하지 않는데, 그 책은 도저히 내 책장에 꽂아 두고 싶지 않았다. 돈과 영성을 연결함에 있어 인과가 과도하게 단순화되어 있다던가 영적 캐릭터를 만들고 여신화하는 것이나, 호텔 커피, 명품 등의 1차원적인 소재로 부의 사례를 들 땐 ‘독자를 우습게 보는구나'하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성공이 마음공부의 '목적'이 되는 순간 영성은 수단으로 전락하고 끊임없이 욕망에 낚시질 당하게 된다. 그런 유혹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나’를 알아가는 공부로서 영성이 추구되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결과로 따라오는 풍요라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니 기왕이면 그 루트를 걸어보는게 합리적인 것 같고 물질적 풍요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풍요도 배우니 오히려 이게 더 현실적이라 판단된다.
다양한 분야의 수업을 섭렵하며 깨달은 점은, 강사의 전문성만큼이나 수강생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간혹 지식의 난이도를 앞세워 강사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과도한 평가와 어색한 친근함을 오가며 묘한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데선 집중이 잘 안됐다. 배움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이리라.
좋은 가르침은 학습자를 '잠재력을 가진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다. 설령 학생이 전달된 지식을 다 흡수하지 못하더라도, 그 존재 자체로 충분히 괜찮다는 존중이 깔린 분위기가 좋다. 나 역시 그렇게 바라봐주는 선생님들 지도 아래에 있을때 가장 나답게 성장한 것 같다.
한편 학습자는 이 스승이 지식 너머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보려고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치가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지도 점검해야한다. 진리의 매개가 되어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며 제자의 성장을 돕는 이가 '참된 구루'라면, 세속을 살아가는 테크닉을 효율적으로 전수하는 이는 '일타 강사'다. 이 둘은 역할과 기대감이 엄연히 다르다. 일타 강사를 구루로 보는 착각은 안하는게 좋겠다 싶다.
내 경험상 어떤 수업을 신청할 때는 그 '내용물'이 궁금해서 시작하지만, 과정을 마친 후 나에게 남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가 자신의 지식을 어떤 태도로 습득하고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보면서 얻은 영감이 나를 변화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처럼 지식이 도처에 널린 시대에 진짜 필요한 것은 조합하고 활용하는 지혜이니 말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유려한 달변가는 매력적이다. 듣고 있자면 금새 그의 에너지에 흡입돼버린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서툴러도 본질을 잃지 않고 자신의 앎에 겸손한 이들에게 마음이 간다. 또 조용히 자신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그의 삶 자체로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는 그런 단단함들에 오히려 마음이 간다.
사람의 마음과 몸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은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유능한 이들에게도 이것은 참 쉽지않은 듯하다.
지식과 더불어 타인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자부심이 선을 넘을 때도 유의해야하지만, 오랜 수련으로 인해 맑아진 부분(sattva, 사뜨와)이 자신의 욕망이나 들뜨는 성질(rajas, 라자스), 어둡고 무거운 부분(따마스, tamas)보다 커질때 자연스럽게 영적 에고가 강해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3구나의 균형의 중요성은 힌두 대표 경전 바가와드 기따(bhagavad gita)14장 6~9송에도 등장하는데, 그래서 우리의 수행은 사뜨와(깨끗함, 고요, 정화)100%를 지향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3구나의 적절한 때에 적절한 정도의 균형이라는 것이다.
보통 수행자들이 사뜨와만을 지향해야한다고 착각하는데 실제 수행은 정, 중, 동 에너지의 조화로움에 있다고 하니 삶의 역동성을 오롯이 긍정하는 문구가 아닌가 싶어 참 좋아하는 가르침이다.
배우는 자는 열의를 다해 배우는 때에도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 아니면 강사의 감정선에 동화되어 그의 팬덤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가.’
앎이 주는 도파민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지만, 때로는 우리를 기만하기도 한다. 상황도, 사람도 늘 변화하기 마련임에도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 내가 속한 계보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려는 심리가 그것이다. 요가, 명상, 의학처럼 몸과 마음의 경계를 다루는 영역에서도 비슷한데, 긍정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면 안내자에 대한 깊은 감사가 일어나게 되고 이는 곧 그와 그의 가르침을 동일시하는 불변의 ‘의리’로 이어진다.
자책 섞인 자기합리화가 반복된다면 점검해봐야하는 것 같다. 수련 중 부상이 거듭되거나 몸이 계속 불편한데도, 수행한답시고 계속 마음이 힘겨운데도 이를 무조건 ‘과정’이나 ‘수행 부족’으로 치부하며 삼키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스승 역시 때로 오류를 범하고 퇴보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 기억해야 한다. 서로를 위해서.
아직 그 여정의 초행길에 있다면 지금의 경험이 정말 넘어서야 할 ‘자기 극복’의 순간인지, 아니면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인지 헷갈릴 수 있다. 자신의 타고난 성정, 인연지어진 주변인들의 소음, 기존에 가졌던 지식이나 윤리•도덕관념 등이 판단을 흐리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묘한 경계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크고 작게 스스로 부딪쳐보는 시도 뿐인 것 같다. 때로는 끈질기게 버텨보기도 하고, 때론 시원하게 놓아버리기도 했던 경험 속에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게있었다. 외부에서 주입된 목소리를 걷어내고 철저하게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않다는 것도 알았다. 내겐 많이 어려웠다.
나는 여전히 배움의 여정 위에 있다. 내게 필요한 스승은 나를 자신의 곁에 묶어두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나 자신에게로 돌려보내 주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라는 것을 40 중반이 넘어서야 깨닫는다. 앞으로도 이 길 위에서 매 순간 점검하며 명랑하게 나아가길 나에게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