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후애_M.N.J(2002)
고등학교 때 나는 오디션을 통해 방송부에 들어갔다.
매일 점심시간, 방송부실 벽에 동기들과 한 줄로 차렷자세로 서서 선배들이 방송하는 것을 본다. 자습시간에는 볼펜을 입에 물고 책 읽는 연습을 하고, 초등학교 숙제 검사를 하든 방송멘트 한 페이지씩 매일마다 검사를 받고 혼난다. 동기 한 명이 잘못하면 동기 다섯 명이 같이 엎드려뻗쳐를 한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버티고 나면 활동기인 2학년이 되고 봄이면 설레는 대면식이 진행된다.
다른 학교 방송부와의 대면식.
당연히 여고 방송부 친구들을 만난다.
같은 방송부이니 앞으로 연락하면서 좋은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 도울 게 있으면 돕자라는 목적이나 사실은 단체 소개팅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 안에서 늘 커플이 탄생하니까.
2학년 대면식 때 '너'를 만났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어. 웃긴 게 '너'와 가까워진 이유는 너의 친구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내게 말해주면서였던 거 같아. 그전에는 나에게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잖아. 그 친구가 나 때문에 힘드니까 잘해주면 안 되냐고, 나의 마음은 어떠냐고. 하지만 나는 점점 '너'에게 관심이 생겼어.
마른 체형에 피부는 굉장히 하얀. 약간은 아파 보이기도 했지. 하지만 쌍꺼풀 없는 큰 눈은 깊었고, 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주변 모두가 느낄 수 있었어. 또 소리 내며 웃지 않고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었는데 그때 살짝 보이는 귀여운 미소가 좋았어.
너의 문자 하나, 너의 전화 하나가 그 당시 나에게는 제일 큰 행복이었어.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 너와의 대화를 기록하였고, 언젠가는 너에게 전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면서.
처음으로 친구와 싸우기도 했어. 같은 방송부 동기 녀석이 너에게 짓궂은 장난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야.
처음으로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기도 했어. 그 당시 우리 담임은 전교에서 알아주는 무서운 선생님이었고, 잘못 걸리면 다음날 손바닥이며 허벅지며 피멍 나게 맞게 될 걸 알면서도.
자율학습을 빠진 날은 바로 빼빼로데이였어. 혹시 부담이 될까 봐 비싼 선물은 살 수 없었어. 그래서 빼빼로를 종류별로 5~6개 사서 검정 봉지에 담아서 지나가다가 들린 척 너의 학원 근처를 서성거렸어. 우리 집은 너희 집과 반대 방향이니까, 지나가다 들렸다고 했던 내 말이 진짜가 아니란 건 넌 알고 있었을 거야.
늘 밤늦게 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전교에서 늘 순위권에 있었던 공부 잘하는 너와 비슷한 수준이 되기 위해서 나도 나름 열심히 했었어. 그 덕에 모의고사에서 수리영역 2등급을 받기도 했지.
몇 번 나와 통화하면서 눈물도 보였던 너이기에 나에게 맘을 정말로 많이 열었다고 생각했어. 가족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울기도 했지.
마지막으로 운 건 내가 고백했을 때야.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으니, 대학 가서 다시 고백해 달라고 했던 너. 일단 이 고백은 잠시 지워두고 평소처럼 지내자고 했던 너.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건 아니었지. 예전처럼 농담하는 게 쉽진 않았고, 대화할 때도 더 조심스러워졌어. 단체로 놀이공원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네가 나의 눈치를 본다는 걸 느꼈어. 그건 피한다기보다는 미안해하는 느낌이었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이 예전보단 줄어들게 되었지. 그때 갑자기 머리를 때리는 게 있었어. 네가 같은 학원에 다니는 남자아이 얘기를 예전에 몇 번 한 적이 있었거든. 공부는 잘하는데 장난은 심하다느니 뭔가 차갑다느니 근데 친하다느니.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의 마음은 그 친구를 향했던 거 같아.
그걸 깨닫는 순간 정말 많이 울었어. 넌 너무 착해서 거절도 돌려서 했던 거야. 내가 지치길 바랐을 수도 있고,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만약 1년 넘는 시간을 정말로 너만 바라보며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해보기도 해. 그렇다고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한 적은 대학 갈 때까지 없었어. 단지 네 앞에 서기가 부끄럽고 미안했었어.
아. 그리고 너에게 썼던 일기장은 10년이 지나서야 하나하나 읽고 버렸어. 생각보다 내가 참 많이 썼더라. 그걸 남겨 놓았다면 지금 이 글도 10배는 길어졌을 텐데. 이제 더 기억이 나질 않네.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말이야. 정말 뭔가 옆에서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장 많이 가졌던 사람은 바로 너였던 거 같아. 혹시 나를 기억한다면. 좋은 기억이 남아있길 바래.
그대를 나 너무 사랑하기에 내가 떠나는 거죠
그토록 그댈 아프게 했던 날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은 채로 살아갈 수 있죠
지금은 힘들지만
몇 년이 지나서 연락을 다시 했을 때 네가 답을 하지 않았어.
근데 그때 정말 네가 전부였어.
후애_M.N.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