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입문 첫날.
나는 체력테스트를 실시한 지 5분 만에 뻗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5분도 안 됐다.
5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기초 체력테스트 과정 중 인터벌과 버피테스트만 받고 중도 포기했다. 1분씩 최대 횟수를 측정하는 것이었으니 실제로는 숨 고르는 시간을 포함해도 4분이 안 될 것이다.
하체는 부들부들 떨렸고, 땀에 젖은 마스크는 코와 입에 달라붙어 숨 쉬기 힘들었다. 현기증이 나면서 속은 울렁거렸다.
"토할 거 같아요. 못하겠습니다."
너무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지만 더했다가는 구급차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관장님께서는 이런 경우가 흔하다고, 쉬고 있으라며 테스트를 끝내곤 다른 관원들을 훈련시켰다.
복싱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이어트다.
업무 스트레스를 야식으로 풀고, 집에서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는 게 일상이었으니 몸은 금세 불었다.
올해 초 몸무게 100kg를 찍고 그 충격에 감량을 시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식욕이 충격의 크기보다 더 컸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나름 97kg까지 뺐지만 생활습관은 바뀐 게 없어 다시 찌고 빠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마음먹게 된 건 건강검진 결과 때문이었다.
'당뇨 전 증상' '대사증후군' 초기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이 충격은 꽤 컸다.
특히, 어릴 적 TV에서 본 당뇨병 환자들의 생활을 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당뇨병은 안 걸리겠다고 다짐했었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매일 인슐린 자가주사를 하는 환자들의 모습은 너무 슬퍼 보였다.
여기에 몇 해 전, 당뇨를 심하게 앓고 계셨던 작은할아버지께서 발가락 상처가 썩기 시작하면서 다리 한쪽을 절단했던 적도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결국 돌아가셨으니 당뇨는 나에게 공포의 질병이었다.
검진 결과를 들은 다음 날부터 점심 도시락을 싸고 다녔다.
저나트륨, 저지방, 저탄수 식단으로 구성했다. 야식이 정말 당기는 날에는 튀긴 치긴 대신 구운 닭을 먹었다.
먹는 게 낙이었던 내 삶이 정말 피폐해지는 순간이었지만 나이 들고 황폐해지는 삶을 살바엔, 젊은 날 잠깐의 피폐가 나았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식단을 하니 93kg까지 빠졌다.
그리고는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매번 운동하기로 마음먹을 때마다 찾아간 곳은 헬스장이었다. 피티도 받았었지만 나는 재미도 없었고
꾸준히 할 만한 인내심이 부족해서 효과를 보지 못했다.
특히 헬창 형님들의 운동 루틴과 겹칠 경우.
예를 들면 내가 벤치프레스를 하고 있을 때 자꾸 끝났는지 확인하는 헬창 형님들의 간절한 눈빛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트레드밀 아니면 머신 이용이 주를 이뤘는데 이것도 중년 아주머니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차지해야 했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에는 거리두기 일환으로 이용 못하게 된 트레드밀이 많았으니 자리싸움은 더 심해졌다.
무슨 운동을 해야 꾸준히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집 앞 상가에 위치한 복싱장이 내 눈에 보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해봤을 쉐도우 복싱.
더파이팅을 보며 따라 해 본 뎀프시롤.
벌써일년 뮤비에 나왔던 배우 장첸의 복싱 붕대 감는 모습이 머리에 스쳤다.
생활체육대회에 출전해 메달까지 따는 상상까지 더해지자 엔도르핀이 솟구쳤다.
그리고는 바로 복싱장에 들렀다.
집에서 3분 거리. 시설도 준수했고, 젊은 관장님의 다부진 몸과 말투를 보니 믿음직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나 복싱 다닐래. 결혼 전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 결혼 전 건강을 되찾고 싶다는 거지 그 시절이 좋았다는 얘기는 아니야"
아내는 웃으며 흔쾌히 허락했고, 그렇게 복싱 세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쉬다 보니 어느 정도 숨이 돌아왔다.
주변에서 운동하는 회원들의 모습도 눈에 보였다.
저녁반이라 대학생, 직장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를 이뤘다.
관장님께서는 오늘 체력훈련을 하자며 내가 했던 체력테스트 종목을 회원들에게 시켰다. 다수의 회원들은 하기 싫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역시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라고 생각하며 위로 삼았다.
하지만 그 위로는 착각이었다. 회원들 다수가 5개의 체력훈련 종목을 중도포기 없이 끝마쳤다. 기록도 좋았다.
더군다나 회원 다수는 여자들이었다. 이 악물고 해내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그렇게 나의 복싱 첫날은 체력테스트 중도포기로 마무리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내일이 와서 복싱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선택한 복싱이 내 삶의 활력소가 될 거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도, 복싱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