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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러플 Sep 19. 2016

고추

하루한편의 쉬운 시쓰기 #60


고추

황현민




아버지는 고추를 말리신다


마당 한 켠에

낡은 빨래대를 펼치고

조릿대로 엮은 돗자리를 얹고

그 위에 고추를 너르신다

비가 오나 이슬이 내리거나

얇은 비닐 한 장 씌우시고

비를 맞추고 이슬을 맞추신다

비닐 한 장 달랑

걷었다 덮었다 하시면서

아버지는 고추를 말리신다


쓰러진 마른나무에서

고추를 주워다가

해가 져도 태풍이 불어와도

헛간에 들이지 않으시고

늘 같은 자리에서

태양과 비와 어둠과 바람과 이슬과 함께

아버지는 고추를 말리신다

고추가 어미와 함께 있을 때처럼

아직도 매달려 있는 사과나무의 열매처럼


빨갛게 고추를 말리려는 것이 아니라

빨갛게 빨갛게 고추를 숨 쉬게 하려고 아버지는 고추를 말리신다

한가위 보름달 아래

달빛 머금고 잘 마르고 있는 고추를 나는 바라본다


당신은 지금 잘 말라가고 있는 중이신가요? 당신은 여전히 생생하신?


늦은 밤

아들은 아버지의 고추들을 다독거렸




 







2016. 9. 19

모든 꽃은 열매를 위해 핀다. 모든 존재들이 다 마찬가지다. 열매는 어미에서 태어나서 홀로 서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익어가야 한다. 그리고 잘 익은 열매가 좋은 씨앗을 영근다. 열매는 살아 숨 쉰다. 열매가 잘 말라야 씨앗이 비로소 완성되고 그 씨앗이 다시 새싹을 틔운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항상 살아있다. 모든 존재는 죽지 않고 항상 숨을 쉬고 있다. 그 숨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최대한 자연 그대로 고추를 말리려고 하신다. 창고 안에 들이지 않고 밖에서 고추를 말리신다. 비가 오거나 이슬이 내려도 비닐 한 장만 덮어주시고 고추가 더 좋은 숨을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다. 고추를 말리는 것이야말로 고추를 더 잘 살리는 것이란 것을 나는 올 추석에 깨달았다.

아버지를 보고 나는 자꾸 투덜거렸다. "그래 가지고 고추가 잘 마르겠어요? " 아버지의 깊은 뜻을 모르고 나는 계속 투덜거렸던 것이다.

마당에는 사과나무가 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간당간당 매달려 있다. 그렇게 사과가 익어가듯이 어미는 최대한 자식을 붙잡고 익게 한다. 그러다가 아침이면 몇몇 사과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자식은 이제 스스로 익어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어미에게서 떨어진 사과 열매는 스스로 익어가고 잘 익어서 좋은 씨앗을 영글어 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고추는 싱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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