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왕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에서
슬픔이라는 빌미
민왕기
빌미라는 낱말이 낯설어서 밤에 사전을 폈다
무엇의 꼬리 같은 이 말을 탐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다가, 근원없이 어지러운 우리말이라는 걸
말의 촉각이 닿을 수 없는 오래된 말이라는 걸 알고는
알 듯 모르는 모든 말의 꼬리에 실을 매달아 보내고 싶었다
빌미라니, 한 생의 꼬리를 감추고 숨어버린 신의 머리카락쯤 되려나
겨누고 싶지만 빗나가는 말의 화살이 있다면, 저 빌미쯤 되겠지만
당신 없는 오후에 사전을 뒤적인 것은 빌미하는 말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한 슬픔이 또 한바탕 오려던 찰라, 이 슬픔이 빌미가 된 것은 무엇인지
발꿈치를 들고 숨어버린, 세상의 어느 조용한 시간에게
잠시 따져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고적 가을
민왕기
떠난 사람은 내게서 무언가를 본 사람, 떠나지 않은 사람은 무언가를 보고도 견디는 사람이고
시월, 단풍 든 해안마을에 푸르스름한 냄새가 난다
이 말의 냄새는 가을이 왔다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가고 있다는, 회의적이고 회고적인 말의 날씨
자신을 달래기 위해 한 생을 써버린 사람들이 붉은 단풍나무 아래를 걸으며 낙엽을 줍고 있다
계절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견디다가 또 겨울로 접어들고
겨울이 와도 떠날 사람은 떠날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은 떠나지 않을 사람이니
봄이 오면 누구든 다시 한 번 새로운 생을 시작해 볼 수 있으리
그러니 떠난 사람, 떠나왔던 사람을 문득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그래도 멋쩍게 인사를 하리
어떤가요, 봄날은 잘 되어갑니까
저녁마다 무사가 되어
민왕기
마늘과 파 당근 상추의 끄트머리, 돼지목살의 가장 두툼하고 맛 좋은 곳을 잘랐던 칼
갖은양념이 배인 부엌칼은 한 집에 하나씩 있고
몸살 난 당신을 기다리며 나는 내게 하나뿐인 칼을 물에 삶고 있습니다.
칼을 드는 저녁마다 무사가 되어
동물의 뼈를 도리고 식물의 관절을 부드럽게 잘랐습니다
무슨 맛이 날지, 귀해서 먹어보지 못했던 칼을 삶으며
여기선 지난 계절, 당신과 내가 해먹었던 수많은 요리의 맛이 날 겁니다
이를테면, 당신이 내게 해주었던 닭볶음탕, 비리고 매콤한 것을 소주와 함께 마시면서
황홀해진 나는 연립주택 담장에 핀 장미를 따러 갔습니다
오늘 칼을 삶으니, 꽃 냄새가 납니다
무엇을 자르기만 했던 칼을 삶으니, 칼이 잘라냈던 무엇들이 우러납니다
칼은 수많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잘랐겠지요 그리고 가끔은 마음도 잘랐을 겁니다
당신이 아플 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귀한 이 칼을 삶아 같이 먹읍시다
칼을 삶으며, 잊었던 아침과 저녁을 데려다 놓겠습니다
오월의 담장에 핀 피 같은 꽃을 따다 놓겠습니다.
어젠,
민왕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를 읽고 여전히 나는 디자인을 먼서 살폈다. 푸른 빛깔의 표지는 내가 좋아하는 색이어서 맘에 들었지만, 속의 폰트와 자간과 행간은 내가 시를 읽는데 자꾸 방해를 했다. 아, 난 왜 이럴까?? 무엇이 나를 자꾸 이렇게 만드는 걸까???
그래서 난 시집을 읽을 땐 한 번으로 그 시집의 시를 다 읽지 못한다. 다시 고요하게 맘을 추스리고 시집을 읽어야 한다. 시집은 적어도 두 번은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시를 알고 시집에 푹 빠질 수 있다.
민왕기 시인의 두번째 시집은 첫시집 아늑,과 달랐다. 아늑,이 여성적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남성적이다. 난 더 달달한 아늑,의 두번째 시집을 고대했었는데, 역시 첫 시집과 달리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 그리고 아늑,은 긴 시간의 시들이 묶인 것이었고 이번 시집은 전업시인으로서(가정주부를 하면서) 바닷가에서 짧은 기간에 지은 시들이다. (시인의 열정과 시력에 감탄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아늑, 첫 시집은 낱말 하나의 제목이 다수였는데, 금번 시집의 제목은 문장(문구)이 다수다. '아가미' 딱 하나만 한 단어다. 첫 시집과 확연히 다르다. 첫 시집은 낱말 하나로 시작해서 시 한편을 지었다면, 금번 시집은 문장 하나로 시작해서 시 한편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연애시집이라고 해서 잔득 기대하고 더 달달한 시집일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번 시집은 달달하지만은 않고 다양한 감정들이 표출되고 있다. 아늑, 곁, 간절, 애틋, 서향집 등 따뜻하고 순도 높은 시어들이 많았던 반면, 금번 시집에는 순수하지만은 않은 시어들까지 다소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장시가 두 편이나 실렸다는 것이 남달랐다. 장시 두 편 모두 훌륭하다.
아마도 여성 팬들은 두 번째 시집을 더 많이 사랑하실 듯 싶다. 반면 남성 팬들은 순정파 아늑, 첫 시집을 계속 그리워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두번째 시집도 참 좋다. 민왕기 시인의 새로움까지 보았으니 더 좋다. 세번째 시집이 또 기다려진다.
여러분,
여러분,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민왕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 많이 사서 읽어주시고 많이 많이 사랑해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