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책』, 삼인 시집선 01
신체의 방
유진목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보았다
한 사람이 가고 여기 움푹 패인 베개가 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요
그러나 여기 한 사람이 오고 반듯한 베개가 있다
저녁에는 일어나 저녁을 보았다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도 없었다
금방 또 저녁이 오고 있었다
잠복
유진목
그 방에 오래 있다 왔다 거기서 목침을 베고 누운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는 것 같았고 그저 숨을 쉬는 건지도 몰랐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방에 있자니 오랜된 아내처럼 굴고 싶어진 것이다 일으켜 밥을 먹이고 상을 물리고 나란히 누워 각자 먼 곳으로 갔다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깨어나는 일
비가 온다 여보
당신도 이제 늙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나 등이 아름답네요
검고 습한 두 개의 겨드랑이
이건 당신의 뼈
그리고 이건 당신의 고환
기록할 것이 많았던 연필처럼
여기는 매끄럽고 뭉둑한 끝
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당신, 이라는 문장
유진목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 몇 개의 간단한 문장 부호로 수식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는 인용도 참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도치와 철지난 은유로 싱거운 농담을 하면서 매일같이 당신을 씁니다 어느 날 당신은 마침표와 동시에 다시 시작되기도 하고 언제는 아주 끝난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나는 뜨겁고 맛있는 문장을 지어 되도록 끼니는 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없는 문장은 쓰는 대로 서랍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맨 아래 칸을 비우던 기억이 납니다 영영 못 쓰게 되어버린 열쇠 제목이 지워진 영화표 가버린 봄날의 고궁 입장권 일회용 카메라 말린 꽃잎 따위를 찾아냈습니다 이제 맨 아래 서랍이라면 한사코 비어 있길 바라지만 오늘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당신 옆에 쉼표를 놓아 두었습니다 나는 다음 칸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쉼표처럼 웅크려 앉는 당신 그보다 먼저는 아주 작고 동그란 점에서 시작되었을 당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문장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있고 쉼표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는 문장 나와 당신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문장을 더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깜빡이고 있습니다 거기서 한참 아득해져 있나요 맨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당신,
사이
유진목
시옷에서 이응까지 선 채로 포개었다가 아득히 눕는 이야기 보드라운 바람이 창문을 넘어오고 눈부신 커튼이 사샤 서셔 소쇼 수슈 스시 우리는 동그랗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가느다란 입술이었다가 오므린 입술이었다가 벌어진 입술로 누워 있는 사이 속옷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발끝에 거는 사이 까르르 속삭이고 웃어버린 이야기 상처난 상처도 오해한 오해도 너는 쉬쉬하고 나는 엉엉 울고 붉어진 이마를 쓸어주는 저녁에도 거기서 우리는 석양을 마주보는 사이 소원을 말하고 들어주는 사이 서운한 게 많아도 꾹 참는 사이 어쩌다 새 옷을 입으면 멋지다고 말해주는 사이 말하자면 별 데 다 근사하고 별 걸 다 기억하는 사샤 서셔 소쇼 수슈 스시 서서히 멀어지다 아련히 돌아눕는 시옷에서 이응까지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소인처럼 찍혀 있는
한밤
유진목
신발을 이렇게 예쁘게 꺼내놨네
너하고 나하고 예쁘게 떠나려고
이 시집의 첫 시를 읽고, 괜찮다, 생각했다. 첫 시가 바로 <신체의 방> 이다. 이 시의 제목은 신체라는 방을 혹은 신체 안의 방을 의미하기도 한다.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서 시집 속의 시를, 혹은 '연애의 책'이라는 시집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인의 자신의 시집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 듯도 해서 적어본다. '처음에는 이 시집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이 시집에 뿅갈거라'는 시인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아침에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고 저녁에는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는 시인이 독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도 없고 금방 또 저녁이 오고 있었다고 한다.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고 시집이 팔리지 않는 현실, 시인은 당연히 인지한다. 하지만 이 시집을 사서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이 시집을 사랑하고 이 시집에 푹 빠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위 5 편만으로도 왜 이 시집이 연애 시집인지 바로 알겠다. 남녀의 사랑하는 장면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렇게 시란 것은 못하는 것이 없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이렇게 사랑하고 싶지 않은가? 아, 이런 사랑 하고 싶다. 아, 부럽다. 시 <한밤>은 난리도 아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뜨거운 남녀의 정사를 상상하게 한다. 분명 남자와 여자의 신발이 서로 이쁘게 포개어져 있었음이라.
좋은 시집을 읽었다. 한 달이 지났구나 부산 번개로 민시인을 만나 민시인 따라 손목서가에 들렀더랬다. 손목서가에서 손목, 두분을 뵙고 가게 앞 바다를 오래 바라보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었다. 당연히 <연애의 책>을 사들고 왔더랬다. 부산 가면 다시 또 들르고 싶은 곳이다. 이곳에 가면 좋은 시집들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