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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학

신비롭고 심오하고 명확한 언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언어를 알아차리고 정확한 언어로 소통하자.

by 라일러플


신비롭고 심오하고 명확한 언어

황현민





귀소 본능(회귀 본능)주로 사용되는 '본능'이란 단어에 대해서 현대 사회에서는 본능이라기보다 욕망이 아닐까 싶다.

인류 전체가 (1% 예외를 제외하고) 99%가 그러하다면 본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그 이하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가 본능이 아닌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고향의 의미는 태어나 자란 곳,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이라지만 이는 엄연히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 친지, 친구, 연인 등이 함께 정겹게 살았던 살고 있는 곳만이 해당한다.

태어나서 학대를 받거나 고아로 자라났다면 고향이 아니라 지옥일 확률이 높으니까.


언어는 심오하고 신비롭게도 명확하다. 그러므로 언어를 정확히 사용해야 한다.


귀소나 회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곳이 바로 고향이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곳이라면 이 또한 고향이다. (제2의 고향이라고들 말하듯이ㅡ) 이러한 고향이 있을 때 귀소나 회귀가 가능할 테니까.


상고대 시대라면 누구나 귀소(회귀)하고픈 마음이 99% 이상 확률로 가능해서 '본능'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현대는 99% 미만이라서 (고향을 찾거나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방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많아서 인구가 확 줄었고 이웃과는 경계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는데ㅡ 실제 30%도 안될 듯ㅡ) 본능이라고 할 순 없다.


그렇다면 본능과 본성의 차이는 무엇일까?

본능은 개인적 집단적 성격이지만 본성은 개인적인 성격이라고 하면 가장 명확할 게다. 공동체의 집단 본능은 있지만 집단 본성은 없다.


또한, 본성은 본능보다 우선이고 가치가 훨씬 높다. 본성은 인류 개개인 스스로 자각해야 하는 것으로 본능과 다르며 현대의 인류는 안타깝게도 본성을 본능보다 더 많이 잃어버렸다.

본성과 본능은 해탈과 해방에 비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해탈과 해방의 경우,

해탈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해방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이다. 그러므로 해탈은 본성이고 해방은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알아차리고 언어를 사용해야 좋다. 그래야 정확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99%의 확률도 잊지 말자. 정확히는 0.1% 예외 제외하고 99.9%여야 한다. 이럴 때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수많은 착각 속에 살고 있고 이로 인한 수많은 오류를 생산하며 살고 있다. 인류는 타인의 거짓말을 자기 편리를 의해 참말로 인지하는 경향이 크고 자기 합리화에서 망상까지, 수많은 증후군들, 욕망 등등... (이러한 것들을 번뇌라고 총칭할 수 있다.)에 시달리며 안타깝고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삶은 진짜가 아닌 가짜가 분명한데ㅡ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쉬운 예다. 증후군은 아주 소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증후군은 마치 당연한 듯 본능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에서 시작해서 수많은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용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인류의 99,9%에 속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마도 1% 미만일 듯싶다.) 따라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절대 본능이 아니다.


정규분포의 확률 또한 소수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규분포를 진짜라고는 할 순 없다. 마치 이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며 기술문명을 발전시킨다면 매우 불안전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현대의 기술문명은 대다수가 불안전하고 위태롭다. 따라서 진짜가 드물고 가짜 투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짜라면 모든 인류가 안전하고 평안해야 기본일 테니까.


진짜를 추구하고 싶다면 99.9%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진짜 삶을 살고 싶다면, 스스로 99.9%를 찾아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C) 2025.01.03. HWANG HYUN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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