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 않아
그와 통화로 티격태격하던 도중 ‘너도 다른 여자와 똑같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휴가와 출장 이후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무척이나 바빴고, 떨어진 거리만큼 연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점점 서운한 감정이 쌓여갔다. 내가 곧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통화를 끊자고 말했고, 나는 약속을 미루어도 좋으니 계속해서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과 얘기하느라 내가 할 일을 하지 못할까 늘 걱정이었고, 나는 그것이 단지 바쁜 그가 전화를 끊고 싶은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표정을 보지 못하고 목소리에만 의지하니 서로의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그와 까끌까끌한 대화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 길에 나는 그의 발언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면서도 친구 N을 만나기 위해 잰걸음으로 땡볕 밑을 부지런히 걸었다. 그가 던진 말 때문인지 8월의 더위 때문인지 조금 어지러운 계절이었다.
왜 진즉에 말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자주 듣고 살지만, 친구 N에게만큼은 별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 특히 그녀는 내가 말을 꺼내기 어려워할 때마다 일본어로 대화하자고 제안한다. 그럼 이상하게도 더 능숙하게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다른 언어로 말하면 마치 내 일이 아니라 먼 타인의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방금 일어난 사건을 그녀에게 술술 털어놓았고, 그녀는 곧바로 나에게 다른 시각을 선물해 주었다. 그녀는 본디 인간이란 다툼이나 갈등 상황에서 상대를 가장 아프게 할 수 있는 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말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한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가 던진 말의 내용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말의 내용이 아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가 말한 대로 사고하자, 그가 뱉은 말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해할 수 있는 상황만이 남았다. 그는 최근에 쌓여있는 일을 해치우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자신을 오해하지 않고 내가 조금 더 이해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순간 마음이 짠해졌다. 그래, 힘들었겠구나. 이해해 주지 못해 미안해. 내가 성숙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좋은 모습 보여줄게. 하지만… 하지만! ‘너도 다른 사람과 똑같다’라는 그 말만은 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평범한 것이 싫다.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죽어도 싫다. 그런 나에게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나에게 불행은 ‘재미없음’이며, 평범은 재미없음과 나란히 붙어있는 불행의 몸과 얼굴이다. 평범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재미 요소가 없다면 나에게는 평범이다. 반복을 해내는 사람을 존경한다. 특히나 반복된 생활 안에서 조금씩 변주를 집어넣는 사람, 그러니까 매일 조금씩 글 쓰는 사람을 동경한다. 평범하지 않을 수 없는 평범한 일상에 재미를 집어넣는 것이 나에게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살리는 도구이자, 나에게 처음 글쓰기를 시킨 N은 나에게 귀인이다. 내 인생(평범)에 재미(쓰기)를 가져다주었다. 생각해 보면 글쓰기는 오늘도 사람 하나를 살린 셈이다. 상처가 된 그의 한마디 말도 이처럼 한 편의 글이 되었으니 말이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육아를 하고 살림도 하고. 그렇게 나이를 먹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연애할 때면 만나는 사람에 대해 쓰고, 결혼하면 새로운 도전에 관해 쓰고, 아이를 낳으면 신비한 경험에 관해 쓰고, 살림할 때는 생활의 지혜에 관해 쓰고, 할머니가 되면 멋진 할머니의 삶을 쓰면 된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다. (그러니까 나 평범하지 않다고!)
나는 자주 싸우는 커플을 볼 때면, 왜 여전히 함께 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우리에게 위기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얻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대방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정보를 얻고, 한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조나 레러 작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자주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더 건강한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런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관계의 지속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갈등이 없는 관계보다 오히려 갈등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는 관계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카톡 알림음을 목탁 소리로 바꾸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부처님이라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를 만나기 전 나의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누구와 다툴 일이 거의 없었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이미 내 삶은 평범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