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언어에서 시작된다. 사랑의 표현, 오해의 시작, 헤어짐의 이유. 그 모든 건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연인과 다툴 일이 생기더라도 표현과 설명에 능한 사람이라면 지혜롭게 해결할 것이다. 온전히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최대한 내 말을 오해하지 않게 표현해야 한다.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잘 설명하는 것이 관계의 숙제일 것이다.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해서 글을 쓰는 사람인데, 다행히도 그는 내 말을 곧잘 알아듣는다. 이해하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내 말뜻을 잘 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가끔은 거울에 대고 나 자신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그에게 말했었다. 그 역시도 어릴 적부터 다양한 외국어를 접하면서 언어의 대혼란을 겪은 사람이라 내 이상한 한국말도 통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다. 나는 이처럼 언어에 예민한 사람이 좋다. 그는 미안하면 왜 미안한지, 고마우면 무엇이 고마운지,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는지 늘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보다 둘이 함께 있는데 외로울 때가 더 괴로운 법이라고.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데도 마치 혼자인 것처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언어의 단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유독 고요하고, 유난히도 외로운 한 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울분 섞인 단어를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나날의 일 년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토해내는 대신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나는 그 해에 어린이 동화부터 심리 뇌과학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약 60권의 책을 읽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책을 읽는 동안 작가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이야기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 못한 날에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일상 사진과 글을 올렸다. 지금도 나처럼 자주 사진을 올리는 이를 만나면, 혹여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건 아닌지 들여다보게 된다. 허공에 대고서 무엇이라도 외쳐야 하는 심정일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아주 오랜 시간 내 삶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이는 하얀 천장이, 퇴근하고 돌아가는 차 안의 차가운 공기가, 술을 마시고 혼자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이처럼 일상에서 마주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종종 내 숨을 막히게 했다. 내 삶은 어딘가 비어 있었고 무엇보다 지루했다. 일하고 놀고 운동하고 밥 먹고 공부하고 글 쓰고 넷플릭스를 보면서 하루하루 빈틈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그저 하루하루가 심심할 뿐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사람, 내 일상을 궁금해하는 단 한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모든 날이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았지만, 외로움 한가운데 서 있을 때는 언젠가 다가올 그 좋은 날들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시간은 흘러가고, 마침내 그가 나에게로 온 것이다.
그를 만나고 나서 드디어 내 삶의 밸런스가 맞춰졌다. 열심히 일을 하고 글을 써도 이제는 꽉 채워진 마음으로 임한다. 땅 밑으로 뿌리가 깊게 박힌 나무처럼, 나는 더 이상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피곤하지 않은지 늘 걱정하고, 저녁으로 무얼 먹었는지 항상 궁금해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토록 원하던 단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를 만나고부터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완전하게 상실했다. 모든 과거를 잊었다. 감사 인사를 까먹을 정도로, 나는 애초에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외롭지 않은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나는 이토록 든든하다. 그의 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이처럼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말을 예쁘게 한다는 것은, 상대가 걱정할 만한 것을 미리 알아채어 안심시켜 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사랑이 담겨 있기에 상대의 불안과 걱정이 보이는 것이다. 거기에는 배려도 담겨있다. 배려는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센스가 담겨있다. 센스가 있는 사람은 역시 능숙하고 멋져 보인다. 사랑과 배려와 센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경의 마음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상대의 능력. 예를 들어 운동, 외국어, 음악 같은 상대의 능력을 동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마주하는 자세를 동경한다. 그런 것은 모두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태도와 자세는 고스란히 그의 말에 나타난다. 능력은 언젠가 상실하지만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은 버릴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영원히 동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