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대소사는 모두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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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에 그와 싸웠다.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하지만 온갖 대소사는 모두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한국에서 하루 한 끼를 먹던 내가 이곳에 와서 그에 맞춰 꼬박꼬박 세끼를 챙겨 먹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꼬치를 앞에 두고 울어버렸다. 뚱하게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그가 오해한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먹은 양꼬치 중에 가장 맛있는 집이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내 표정 때문에 분위기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했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건지 화장실도 이틀째 가지 못한 날이었다. 나는 일 년에 한 번꼴로 울 정도로 메말랐는데, 한번 넋 놓고 울기 시작하면 젖먹이 시절로 돌아가 3시간이고 5시간이고 서럽게 울 수 있는 사람이다. 뭐가 그리도 서러웠는지 그날따라 나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양꼬치를 먹던 중국인들까지 모두 밥맛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를 보고 별의별 안타까운 상상을 했을지도. 그가 나를 수습하느라 입도 대지 않은 음식을 포장해 달라고 하고 계산하려고 했다. 미국은 보통 계산서를 테이블에 가져다주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카운터로 가서 계산하고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 여주인이 그를 불러 여자를 울리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는 얼떨결에 죄송합니다 사과까지 하고 돌아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나는 창밖을 보며 조용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한국이었으면 내 차로 운전해서 멀리 도망가고 싶었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택시 기사가 이 상황을 오해할까 겁이 나기도 했다. 크게 오해하고 경찰이라도 부른다면, 그는 내 남편이니 걱정하지 말라 말하는 상상을 하며 마음속으로 영어 문장 따위를 만들고 있었다. 그가 미국 경찰에게 잡혀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므로. 다행히 별일 없이 집에 도착했고, 나는 씻자마자 엄청나게 센 감기약을 먹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조금씩 오해를 풀었다. 그는 부딪칠 일이 생기면 바로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나를 잘 먹이는 것으로 생각해 최선을 다해 그랬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위했고, 나는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린 일상이 버거워서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 낯선 곳에서 내가 살던 대로 똑똑하게 혹은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안하다며 내가 너에 대해서 잘 몰랐다고 사과했다. 다투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가끔은 그런 계기로 서로를 알아가고 그래서 더 애틋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싸우는 도중에도 그가 했던 따뜻한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너를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야.’라고 말했을 때 그 말에 안심하고 더 울었다는 건 비밀이다. 5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네가 얄미워지지 않을 거라던 그의 따듯한 약속이 모두 내 안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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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으면서 그와 딱 두 번 다투었다. 두 번째로 싸운 날, 나는 그 상태로 혼자 외출해서 한국에 있을 때 손님으로 만났던 미국인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는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두 번째는 확실히 내 잘못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단지 농담인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자존심을 꺾는 말이었다. 집 열쇠가 하나뿐이라 그에게 전화해서 내려오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냉동고 속 같은 밖에서 유리 창문 너머로 엘리베이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우다다다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4층에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온 것이다. 그와 다툴 때마다 이처럼 그에 대해 깊게 알게 된다. 누군가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면 마음에 있던 두려움은 사라진다. 다투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그 후로 서로 조금씩 조심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이제는 지켜야 할 선과 어떤 말이 그를 아프게 하는지 깨달았다. 통화만 할 때는 알지 못했던 그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나 역시 평소 알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서로를 잘 몰랐던 것뿐이었다. 이제 겨우 여행의 반이 지나고 있었다.
싸운 날 저녁. 그가 이불 밖으로 삐죽 나온 나의 발과 목을 꼼꼼히 덮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나에게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자신을 남자 친구 혹은 언젠가 남편으로서 자신감을 갖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날 나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이 약속 하나만은 반드시 지키리라 다짐하며 잠에 들었다. 철없는 나를 인간 만들어 주기 위해 누군가가 내게 그를 보내주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불을 덮어주는 그의 손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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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더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다.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고등어를 구워주고 미역국을 끓여주고, 고수가 들어간 라면도 만들어 주며 내가 자신과 똑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사실 이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사안이기도 했다. 고수 샐러드를 주문했더니 혼자 다 먹으라며 내 앞에 가져다주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다. 그래서 평생 고수 잘 먹는 동반자를 꿈꿔왔는데, 오히려 내 입맛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나다니. 내가 평생 찾아다닌 사람이었다. 그는 잔소리가 없다. 아예 없었다. 나의 단점이나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꽤 고집 있어 보이지만 막상 해달라는 건 전부 들어준다.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싶다고 하면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코 팩을 붙여주면 얌전히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아내가 입혀주는 대로 입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생각이 깊고 예민한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소리에 예민한 편인데 스스로 모르는 것 같다. 차 경적이 울리거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가 나면 ‘시끄러워!’하고 습관적으로 말했다. 잘 안 웃는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주 웃어주었다. 내가 일부러 못생긴 얼굴을 하면 그는 귀엽다고 또 웃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엄마를 웃기고 싶은 자식의 마음으로 나는 그를 웃기기 위해 장난을 쳤다. 그는 설거지하면서 가스레인지까지 모조리 분리해서 닦는 사람이고, 무언가를 해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알아보는 사람이다. 마음이 여린 동시에 기가 세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고 했다. 하루는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데 뒤에서 할머니가 내게 도넛 하나만 사 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가 돌아서서 할머니에게 All right. You can grab some이라며 도넛을 고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이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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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희미한 불빛이 느껴져서 일어났더니 뉴스를 틀어놓고 잠든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빛에 열브스름히 비친 벽지의 색감과 분위기가 완전히 까먹고 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로 바빠 대부분 외할머니와 자던 나는, 새벽에 자는 나를 뒤로하고 볼륨만 낮춰서 텔레비전을 보시던 할머니의 등을 보며 자랐다. 그와 있으면 이렇게 잊고 지낸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날이 자주 있었다. 오늘은 그와 도미노 파크에 있는 아이스링크장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예상보다 사람이 없었고, 모두 초보자여서 마치 아이스링크장 전체를 빌린 기분이 들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 스케이트를 탄 것이 초등학생 때라고 말했다. 우리 둘 다 처음에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한발 한발 위태로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숭숭 달리기 시작했다. 언니 오빠들 사이로 날쌔게 달리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만큼은 타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몸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 자전거나 스케이트를 타 본 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그와 있으면 이처럼 무방비 상태가 되어 애써 늠름하고 씩씩하게 굴지 않아도 되었다. 한국에서 일할 때의 어른 같은 내 모습이 아니라, 그저 편안하고 아이 같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어릴 때 수영장에 갔다 오면 꼭 라면을 먹었던 것처럼, 우리는 허기진 몸을 이끌고 그의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라멘집에 가서 미소 라멘과 유자 쇼유 라멘을 먹었다. 물론 맥주를 시키긴 했지만 라멘집에서 팁을 포함하여 한화 14만 원은 훌쩍 넘는 가격에 내가 지금 미국에 있다는 게 실감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