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다음으로 가장 큰 사랑을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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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NBA 브루클린 네츠(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 농구팀) 경기를 보고 왔다. 힙한 조명과 음악 사이로 2시간 넘게 이어지는 선수들의 화려한 몸짓에 넋을 놓고 보다가도,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간헐적으로 떠올랐다. 그와 뉴욕에 있으면서 매일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하지만 나의 세상을 넓혀주는 그를 두고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또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막 한국에 도착했고, 그에게 잘 도착했다고 문자를 했는데 답장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상대방 전화기가 밥(?)이 모자라서 전원이 꺼졌다는 음성 메시지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와 연락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뉴욕으로 돌아가기 위한 나만의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뉴욕으로, 그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프로젝트. 우선 가족과 카페에서 진중한 대화를 나눈다. 어떤 비자를 받아서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해 상의한다. 그리고 비자를 받고, 준비하고, 돈을 모으고… 꿈에서 깨었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며 똑같은 내용의 꿈을 연속으로 꾸었다. 나는 벌써 뉴욕이 그리운 것이다.
이틀 전에는 그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려서 거의 헤어질 뻔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확실히 내가 문제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알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고 무지하면 오히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주는 악마가 되기도 한다. 나는 나를 거의 포기한 듯한 그 앞에서 서럽게, 서럽게, 서럽게 세 번 크게 울었다. 나는 그를 안고 사과하며, 너와 함께한 한 달이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고백하며 울었고, 내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타던 그가 떠올라 또 울고, 우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그의 따스한 손길에 또 한 번 뒤돌아서서 크게 울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용서해 주었고, 그날 이후 나는 그가 더욱 소중해졌다. 그는 화가 난 와중에도 열쇠가 없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고,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이런 사람이 평생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의 미래를 택하는 것이 오직 핑크빛 미래만을 꿈꾸겠다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는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겠다는, 어른이 되겠다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처음으로 진정한 연애를 하면서, 나는 연애란 사람 공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들여 한 사람의 역사를 알아가고, 사건 사고를 통해 그의 심리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렇게 스스로 자라기도 했다.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의 삶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대화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뉴욕에서 인생을 배운 것 같다. 그게 꼭 뉴욕이라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애정을 가지고 한 사람을 깊이 관찰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고, 살뜰히 보살피고, 아플까 봐 걱정하고, 잘 되기를 응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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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오늘 날씨가 참 좋다. 우리 아침은 나가서 먹고, 저녁에 장 봐서 들어오자." 전화기 너머로 햇살이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오늘은 초봄 같은 부드럽고 상쾌한 날씨였다. 미국에 빨래하러 왔냐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빨래 노래를 부르던 나를 위해 현금을 뽑으러 간 그에게서 온 전화였다. 뉴욕 아파트는 집 안에 세탁기를 설치할 수가 없고, 대신 지하에 공동으로 쓰는 코인 세탁기를 사용해야 했다. 집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날씨기에 우리는 나가서 딤섬을 먹고 리바이스 청바지 매장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구매를 미루는 그에게 한국에 가기 전에 꼭 청바지 한 벌을 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다섯 개의 청바지를 갈아입었는데, 아들을 둔 기분이 들어 그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성의 옷을 봐준 것이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는 대부분이 처음이라 억울하다고 말했더니 자신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최선을 다해보기는 처음이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에게 꽤 어울리는 청바지를 골라 계산했다. 뉴욕에 남은 날들을 그에게 필요한 몇 가지를 사면서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없었으면 통바지 말고 스키니한 거 사려고 했지? 묻자, 내가 없었다면 청바지 자체를 사러 오지 않았을 거라고 해서 웃었다. 쇼핑을 끝내고 다시 따스한 햇볕 아래로 나왔다. 날씨가 이렇게나 좋은데 걷는 내내 옆에서 슬픈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무표정이나 걸음걸이에서 어쩔 수없이 묻어 나오는 감정이었다. 내가 피곤하냐고 묻자 아니라고 대답했다. 몇 가지 질문에 아니라고 일관하던 그가 내가 ‘슬퍼?’라고 물었더니 ‘조금’이라고 대답했다. ‘왜? 내가 곧 가니까?’ ‘그것도 포함해서 여러 가지로.’ 슬픔이나 사랑에 모양이나 색깔이 입혀져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것들은 잘 숨길 수가 없다.
뉴욕에 있는 동안 자주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만 알고 있는 잘생긴 표정이나 왼쪽 눈썹을 치켜뜨는 그런 사소한 습관까지 모두 눈에 담아 가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졸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매번 내가 졸았는데, 그가 옆에서 꾸벅꾸벅 졸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단지 옆에서 자는 것뿐인데 그가 멀리 가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 그를 쳐다보고 있으면 오만가지 감정이 들었다. 그가 가끔은 아빠 같고 또 오빠 같다가, 무방비 상태의 얼굴을 하면 나의 아기 같을 때도 있었고, 어쩔 땐 코찔찔이 철부지 남자아이 같기도 했다. 그러다 내 가족들의 모습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슬펐다가 기뻤다가, 애잔했다가 미웠다가, 서운했다가 또 웃겼다가. 일 년 동안 겪을 희로애락을 그와 함께 있는 한 달 동안 모조리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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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의 비밀 하나를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 비밀을 듣고 당신은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런 대답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듣게 된다면 그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루한 내 인생에 특별하고 재미난 보물을 만난 것이다. 우리의 첫 만남부터 나에게는 커다란 이야기가 되어 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모든 인연은 엄청난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탄생하는 것일 텐데, 우리가 만날 확률은 도대체 몇 퍼센트였을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부터, 부산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뉴욕 사람을 만날 확률. 그를 만나러 내가 뉴욕까지 올 수 있었던 확률. 뉴욕에서 만난 두 사람이 마음이 변치 않고 사랑하게 될 확률. 아주 우연한 사건들이 모여 내 인생이 바뀌었다. 인생을 바꿀 엄청난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살면서 엄마 다음으로, 가장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