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얼굴에서 단단함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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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안녕하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슬프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의 손을 놓기도 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살고 있는 이곳이 좋아져 버렸는지, 비행기가 뜨지도 않았는데 벌써 둘 다 그리워지는 듯했다. 정확히 언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돌아올 날을 그리며 면세점에서 뉴욕 엠파이어 빌딩이 그려져 있는 캔 초콜릿을 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뿐이었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곳으로 날아와 한 달 동안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전혀 다르게 살아온 우리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감정이 오갔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웬만한 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새로운 감정이 피어났다. 그를 보면 엄마가 아이를 보듯 애틋하고, 어디서 많이 본 사람처럼 익숙했다. 이제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비행기 안에는 여행을 끝내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연인들이 보여 부러웠다. 다음에는 그와 함께 한국으로 가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오늘 밤은 그가 잠을 잘 자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떠난 후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바빠졌고, 나는 비수기 가이드라 여유로웠다. 우리는 다시 14시간 시차가 생기며 각자의 생활과 도시로 돌아왔다. 그는 눈을 감으면 여전히 공항에서 헤어지기 전 내 얼굴이 아른거린다고 했고, 나는 곧 만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한 5월쯤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미국 비자를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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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아일랜드에서 살아 본 경험으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학생 비자를 받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무슨 비자를 원하든 꼼꼼히 서류를 준비해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직접 인터뷰를 봐야 하고, 신청 비용과 수속 절차를 도와줄 유학원의 도움까지 빌린다며 몇백만 원은 우습게 깨졌다. 그런데도 대다수는 거절을 당하며, 다음 기회가 주어지기까지 몇 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비자에 한 번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더 이상 ESTA(미국 전자 여행 허가)로 미국에 관광도 갈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높은 확률로 떨어지는 비자 때문에 어쩌면 평생 미국에 갈 수 없다는 두려움과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 앞에서 나는 일주일간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성공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시도해 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확률일지라도 개중에는 분명 비자를 받고 출국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미국에 가기 위한 서류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서울에 있는 유학원과 통화로 영어 인터뷰 연습을 하며 두 달을 보냈다. 비자를 받겠다는 일념으로 나의 온 신경은 인터뷰 연습과 미국 유학 카페에 올라온 후기를 훑어보는 것에 쏠려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폐관 수련을 강행하며, 약속을 잡거나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나는 왠지 비자가 통과될 것 같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벌써 그와 살 집을 알아보고, 침대는 어떤 크기로 사야 하는지 혹은 미국으로 가져갈 물건을 고민했다. 자꾸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내 기대치는 끝없이 치솟아 올랐다. 유학원에서도 이렇게 인터뷰를 잘 준비한 사람은 드물다는 듯 말했다. 때론 두려움이 불쑥 올라와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최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질문 두 개에 바로 거절당했다. 무조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던 탓인지 그냥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지금 꿈꾸고 있는 거야. 눈을 떠. 어서 일어나. 마치 비현실 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한순간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20대 초반 운전면허에 떨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떨어지자마자 폭풍 같은 슬픔에 휩싸여 한 4시간 넘게 대성통곡을 했었더랬다. 국밥을 입에 퍼 나르면서도 눈물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집에 돌아가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그전까지 시험에 척척 붙었던 내 인생에서 운전면허에 떨어진 건 나의 명확한 첫 실패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소하다 못해 아주 소소한 실패였지만 그때는 되게 심각했다. 그리고 비자에 떨어진 그날 역시 심각한 좌절감이 쓸개부터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20대처럼 길에서 울 수 없었던 나는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오롯이 혼자가 되자 서서히 충격과 함께 온몸에 현실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텔 방 침대에 털썩 몸을 맡기자 드디어 슬픔이 벼락처럼 내려앉았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방울방울 차올랐다.
감정에도 순서와 흐름이 있다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나의 감정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듯했다. 슬픔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엄청난 분노가 찾아왔다. 분명 다른 이들도 부푼 기대를 안고 마음 졸이며 오랜 시간 준비했을 텐데, 내 앞으로 소시지처럼 줄줄이 떨어지던 사람들이 생각나 화가 밀려왔다. 나는 그렇게 하루 종일 제정신과 제정신이 아닌 상태 사이에서, 그리고 슬픔과 분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괴로움을 이겨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날 하루는 손에서 휴지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밥을 먹으면서도 도저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운전면허에서 떨어진 아직은 젊고 철없던 그때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서울에서 지하철로 1시간 거리인 의정부에 목사님이신 이모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이모는 나를 보자마자 내 얼굴이 달라 보인다고 말했다. 울어서 그래요. 운 것 같지는 않아. 그럼 살쪘어요? 아니, 살찐 건 아니야. 왠지 네 얼굴에서 단단함이 보여. 자초지종을 모르는 이모에게서 들은 그 한마디에 내 발끝이 땅에 닿으며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슬픔에 부들거리던 사이 완전히 까먹고 있던 나의 믿음이 떠올랐다. 큰일이 지나가면서 사람의 마음에도 굳은살이 생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인생에서 습득한 가장 큰 무기는 멘털 관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던 문장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에게는 기도문 같은 문장이었다.
‘항상 일이 술술 풀리고 행복하기만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항상 어렵고 힘들 필요도 없다. 사람을 나아가게 하는 것은 기쁨보다 슬픔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건 슬픔보다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양쪽 모두, 음과 양처럼, 배터리의 플러스와 마이너스처럼 모두 내게 필요한 감정이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모두 나 잘되라고 생기는 일이니까. 혹여 타인이 나를 나쁜 길로 인도해도, 운명은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할 것이라 믿는다.’
나는 스스로 종교가 있는 사람 혹은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부르기가 부끄럽다. 종교적인 삶을 살지도, 성당에 자주 나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온 문구나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가 종교적인 삶을 사는구나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계획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저 주시는 대로 받겠다는 약속은 성경에도 나오는 마음가짐이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닥치면,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게 맡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 현명하다.
과거에도 바라고 바라던 일이 크게 꺾이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세상에는 내가 이토록 바라는데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일은 내게 꼭 필요할 때, 마침 내가 견딜 수 있을 때만 생겼다. 그 후로 나는 스스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얀 종이 위에 손으로 글을 쓰고 또 썼다. 쓰면서 스스로 알려준 것이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감사하는 마음, 나는 앞으로 괜찮을 거라는 믿음, 또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고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 자신을 구원해 본 사람은 회복의 과정을 세세한 부분까지 온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도운 경험으로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 영영 떠나거나,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의 무참한 상황만 아니라면 고통은 축복이다.
예전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열하기에 바빴는데, 지금은 그저 모든 게 감사하다는 말 뿐이다. 나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감사합니다. 그저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제게 필요한 때 마침 필요한 것을 주셨으니, 이번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그저 주시는 대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 저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 알아요.” 가끔은 이 세상이 정말로 정교하게 짜인 시스템 아래 한치의 우연도 없이 운명적으로 굴러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단 하나의 사건에도 우연의 일치는 없다. 누군가와의 만남, 나에게 생긴 사건, 내가 받은 것과 준 것, 어떤 계기로 인해서 내린 결정. 모두 거미줄처럼 복잡하지만 아주 섬세하게 짜인 실처럼 말이다. 내가 1을 겪지 않았다면 2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게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나는 이번 일도 우연이 아닐 거라 믿기로 했다. 모든 게 나를 위해 생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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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국을 평생 안 가도 되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나? 여기 있는 모든 낡은 것들을 뒤로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나? 아니면 그가 한국에 오는 편이 앞으로의 우리 미래를 위해 더 좋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펑펑 우는 나에게 그는 한국에 오겠다고 말했지만, 왜인지 개운치가 않았다. 그가 완전히 한국에 올 방법을 찾아볼 때도 왜인지 찜찜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도저히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국에 살고 계신 그의 어머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 대화의 흐름이 재도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했는데, 그런 분위기에 남몰래 안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는 우리가 꿈꿔온 것들을 포기하기가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것 또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가 나에게 주는 새로운 세계도 사랑했으니까. 나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한 번 고배를 맛본 뒤라 조금 더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좋든 싫든 시간은 지나가고 인생은 멈춤 없이 굴러간다. 지금은 좀 더 ‘어떻게든 되겠지’와 같은 가벼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