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새로운 이야기
내가 중학생일 때, 양치를 하며 화장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했던 다짐이 있었다. 강처럼 길게 쭉 뻗은 길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였는데, 유난히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찬 가을 하늘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쓸쓸하게 먹구름 낀 가을이 오면 꼭 떠나고야 말겠다는 다짐이었다. 어디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 채 그냥 어디로든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더랬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다시 뉴욕으로 떠나기 전 한동안은 그날의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날씨가 이어졌다.
그 후로 꽤 시간이 흘렀다. 뉴욕 공항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10개월이 되었고, 우리가 연애한 지도 1년 반이 되어간다. 물론 그중에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 있었던 날은 뉴욕에서의 40일 남짓이다. 그와 떨어져 있는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단연코 내 일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일을 했다.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 오로지 일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만약 지금보다 더 빨리 한국을 떠났다면 조금 더 일하고 싶었다는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한 것 같다. 일에 있어서 적당히를 모르는 성격 때문에 감정과 체력을 100%를 소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잦았고, 자꾸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났다. 긴장을 잘하는 탓에 자주 어깨 쪽에 근육통이 생기고 담에 걸려 고생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바쁘디 바쁜 가을 시즌이 돌아왔고, 누군가 멈추어 주지 않았다면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나는 또 경주마처럼 질주했을 것이다. 경주 APEC까지 앞두고 있었으니 아마 경주를 제집 드나들듯 고속도로를 달리지 않았을까. 가끔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아직 운명의 순간이 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되새긴다. 나는 경주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고, 이 일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적절한 시기에 드디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딱 10년 전 10월에 나는 한국을 떠나 아일랜드로 갔었는데, 정확히 10년이 지나 먹구름으로 가득한 10월이 되자 나는 또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사람의 삶에도 리듬이 있고, 인생의 큰 변화가 10년 간격으로 일어난다는 말이 조금은 믿기기 시작했다. 이런 큰일을 두고 '운명'이라는 단어가 비명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물론 아무리 완벽한 타이밍이라 할지라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잠이 오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어느 새벽에는 문득 일본 유학생 시절 일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참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날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과 가장 좋아하는 친구 셋이서 주말에 몰래 놀러 나갔다가 우연히 ‘귀신의 집’에 들렸던 날이었다. 유원지는 아니었고 팝업 스토어처럼 귀신의 집만 덩그러니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본답게 아주 세밀하고도 아주 무섭게 잘 만들어진 곳이었는데, 사색이 된 채 귀신의 집을 도망쳐 나온 친구와 나에게 좋아하는 선생님은 엉뚱하게도 야한 생각을 해보라고 권했다. 집에 돌아가도 기다리는 가족 없이 덩그러니 혼자 남겨질 우리가 걱정돼서 내민 따뜻한(?) 조언이었다. 야한 생각은 무서움을 가시게 할 거라고. 그러니까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거라고. 그때 선생님의 논리라면 지금 이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른 감정으로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상하게도 분노였다. 분노는 어떨까. 분노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분노의 다른 말은 용기. 문득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였다는 사실이 마음을 스쳤다. 용기를 갖는다는 건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닌, 두려움을 안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문장을 어딘가에서 본 적 있었다. 지금 내가 감당하는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시간이 꽤 지나서야 알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알 도리가 없는 일에 그저 두려움을 안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떠나는 당일 새벽에 나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를 기약 없는 헤어짐 앞에서 모든 것이 공평하게 소중해진다. 공항에 늦게 도착한 탓에 겨우 짐을 부치고 포옹할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꼭두새벽부터 달려온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내가 이토록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의외로 눈물이 나지 않아 나도 이제 떠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마지막에 나의 3살짜리 조카가 탑승구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쫓아오며 “고모 사랑해”를 연신 외치는 바람에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단지 내가 대답하지 않아 성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였지만 그게 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고모 사랑해!!! 사랑해!!! (빨리 대답해!!!)” 아직도 김해공항 천장까지 울리던 우렁찬 고백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공항은 가도 가도 늘 묘하고 신비로운 곳이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익숙하던 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되고, 기내에서 잠깐 잠에 들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눈뜨게 되는 마법 같은 곳이다. 1, 2층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장소에서 오는 오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공항이란 늘 주사 맞기 전과 같은 긴장감과 동시에 낯선 설렘까지 주는 이상한 곳이었다. 다행히도 헤어짐을 준비하느라 며칠간 잠 못 이룬 탓에 기내에 앉자마자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분명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뉴욕으로 오기 전, 나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당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역시 당신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서로가 가진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겠지. 우리는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 채 오랜 시간 각자의 삶을 살아왔으니까. 나는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다. 먼저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빠 엄마부터, 돌아가신 삼촌들과 할머니들 이야기까지. 가족은 내 뿌리와도 같기에 그들의 고향부터 나와 있었던 모든 사소한 일까지 알려주고 싶다. 어릴 적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내가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그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만나기 전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떻게 하다가 외국어를 하게 되었는지, 무슨 마음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도 더 자세하게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은 어때? 라며 똑같은 질문으로 그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앞으로 그와 함께 이것저것 시도해 보면서 우리에게는 같은 추억이 쌓일 것이다. 같이 아는 사람이 생긴다면 밥 먹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 떠들기도 하고, 며칠 전 웃긴 에피소드가 생각나 둘이 침대에서 키득키득 웃기도 하면서. 어쩌면 미래를 바꿀만한 선택 앞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하고. 이제는 나를 위한 계획이 아닌, 우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당신을 가장 많이 아는 건 나, 나를 가장 많이 아는 건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해 다시 한번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