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아직도 배워야 할 게 산더미라니.
뉴욕 날씨는 참 건조하다. 부산은 바다 옆이라 습했던가? 뉴욕도 강과 바다가 맞닿은 항구 도시인데, 내 입술은 자꾸 건조하다 못해 사막의 모래알처럼 메마르고 꺼칠꺼칠하다. 충분히 수분 섭취를 해주어야 하는데 여기 물맛이 이상해서 그렇다. 벌써 한국의 정수기까지 그리워지는 걸까. 어제는 김치 한 통을 작은 반찬통에 옮겼더니 퇴근하고 돌아온 그가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이곳 물맛이 이상한 건 모르면서 김치 냄새는 귀신같이 알아채는 그를 보며 겉모습은 동양인이지만 속은 미국인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직 집에 식탁이 없을 때, 내가 바닥에 앉아서 먹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단호히 “나 바닥에 못 앉아”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나는 심지어 이케아에서 모든 의자에 아빠 다리를 시전하며, 그나마 바닥에 앉은 기분을 주는 의자를 고르기 위해 애썼는데 말이다. 우린 닮으면서도 다른 점이 많다.
그가 출근한 날에는 혼자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주문을 하고 그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대견하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초등학생이 할 법한 일을 해내고도 칭찬받을 수 있다니, 갑자기 자신감이 붙은 나는 저녁에 혼자 ‘plastic wrap, plastic gloves, ziploc bag’까지 사서 돌아왔다. 혹시 몰라서 비닐 랩, 비닐장갑, 지퍼백을 미리 사전으로 찾아보고 나갔는데, 단어를 한 번 보고도 외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해서 지금 외운 대로 한 번 써보았다. 여기에 있으면서 영어만큼은 확실히 늘었으면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나 홀로 프로젝트로 <한 달에 한 권 영어 원서 읽기>와 <매일 영어 단어 7개씩 외우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종일 영어를 쓰면서 일했는데도 여기 오니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는 영어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요청해야 하는 영어를 쓰는 게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게임에서도 나이가 어리거나 불리한 누군가가 있으면 깍두기로 끼워주지 않던가. 한국에서보다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진 나는, 스스로에게 몇 달간은 이곳에 익숙해지기 위한 깍두기 기간을 허락하기로 했다.
집안일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한국에서 요리하지 않는 삶을 산 나는 살림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엄마는 옛날부터 내게 어차피 시집가면 저절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되도록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 역시도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기꺼이 하고자 했던 일이기에 괜찮았다. 나는 그와 함께 살게 된다면 꼭 요리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혹여 우리가 싸우고 화가 나도 맛있는 찌개를 보글보글 끓여서 함께 먹는다면 어떤 문제도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록 유튜브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어찌어찌 매일 다른 메뉴의 음식이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햇반을 사 먹었다. 하지만 한국보다 2배나 비싼 가격에 역시 밥솥을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와 H mart에 갔다 왔다. 다음날 새 밥솥으로 밥을 하며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엄마가 깜짝 놀라며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쓰던 밥솥과 똑같다고 말했다. 어쩐지 계속 눈길이 가는 게 이상했다. 스무 개가 넘는 밥솥 앞에서 유독 그 앞을 서성이게 하던 핑크색 밥솥이었다. 왠지 내 어린 시절을 자극하듯 진열대에 다소곳이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무의식의 세계는 이토록 놀랍다. 한국에서 요리를 잘 하지 않았는데 분명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국자를 놓는 위치부터 요리하며 나오는 습관까지도 모두 엄마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빨래는 집 안에 세탁기를 설치할 수 없어 코인 빨래방에서 해야 했다. 뉴욕의 많은 아파트가 100년도 넘은 오래된 건물이라 세탁기 설치가 금지된 경우가 많은데, 노후화된 배수관이 세탁기의 물을 견디지 못해 누수가 생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뉴욕의 한 코인 빨래방에 갔을 때는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제 넣는 구멍이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 까치발을 해도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 작은 사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높이였다. 사실 작년에도 느꼈지만, 버스나 카페에 앉아도 종종 발이 땅에 닿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한국 유니클로에서 M 사이즈를 입던 내가 XS 사이즈의 잠옷 바지를 샀는데 그마저도 통바지처럼 널널했다. 작아서 좋은 점이라면 키즈 신발을 사서 20$ 정도 아낄 수 있다는 정도일까. 부산에서는 다 큰 어른인 내가, 여기 와서 몸도 마음도 다시 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신기한 아이처럼, 나는 여기서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인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그가 부엌 수납장 안에 내가 사 온 티백을 들어 올리며 “또 어디서 자메이카 흑인이 먹는 거를 사 왔어?”라며 웃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데 이 상황이 진심으로 웃기기도 하다. 이 나이에 아직도 배워야 할 게 산더미라니. 어쩌면 기쁨으로 여겨도 좋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