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저 ‘혼란스러운 도시’
맨해튼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미국이란 뭘까.
아일랜드에 살았을 땐 비교적 빨리 내 안의 정리가 끝났다. 여기서 말하는 ‘정리’란, 그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감각들을 얇게나마 채워가는 일이다. 아일랜드는 대체로 아이리시가 살고 있고, 그들만의 고유문화가 있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수집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자면…, 특유의 영어 악센트와 아이리시 펍, 기네스, 위스키, 아이리시 커피, 감자, 책 <더블린 사람들>, 작가 오스카 와일드, UFC 선수 코너 맥그리거, 하프 연주와 스텝 댄스, 세 잎 클로버,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가 오면 초록색으로 물드는 거리가 있다. 그 나라를 떠올리면 이런 이미지들이 자연스레 포개졌다.
그런데 지하철에 앉아 맞은편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저 혼란스러웠던 것은, 미국인이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역을 지날 때는 백인보다 히스패닉이 더 많고, 차이나타운에 가면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듯하다. 한인타운의 풍경은 한국의 어느 번화가 골목과 닮아있고, 거리마다 서로 다른 언어의 간판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가끔은 그 낯선 조합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져 이색적인 세상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마트 가판대에 꽂힌 신문조차 처음 보는 글자들로 가득하다. 미국에 온 지 오래되지 않은 내가 이 나라를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는 건 아니지만, 이토록 다양한 얼굴과 언어 속에서 본능적으로 자꾸 묻게 되는 것이다. ‘대체 이곳은 어떤 나라일까?’ 만약 그를 만나기 전, 내가 미국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내 안에 이미 이 나라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자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선입견 없이, 머릿속이 백지상태인 채로 이 땅을 밟으니 뒤늦게 의문들이 하나둘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보스턴이나 다른 주에 가면 미국이란 이런 것이구나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여긴 뉴욕이라 조금 특별한 것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고, 나에게 ‘나라’라는 개념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겨우 네 시간이면 충분한, 그 정도의 규모였다. 우연히 내가 살아본 일본과 아일랜드 역시 모두 한국만 한 크기의 섬나라였고, 그래서인지 내가 바라보는 뉴욕은 하나의 도시라기보다 하나의 나라에 가까웠다. 미국을 대표하는 무언가를 말하기에 이 땅은 너무나도 넓고, 뉴욕은 또 너무나도 다양하다. 작년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번엔 마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하나로 형언할 수 없는 이 특별한 도시를 꼭 파악해야만 한다고 내 안의 생존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다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미용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지나가는 사람들의 헤어스타일만 눈에 들어오고, 새 신발을 사야 할 때는 유독 시선이 바닥으로 향한다. 요즘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어느새 뉴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유튜브 댓글을 봐도,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또 어쩜 그리도 많은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던 유명 인사들까지 하나둘씩 뉴욕을 배경으로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유명한 사람들이 다녀간 장소에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뉴욕일까. 다른 사람들은 뉴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들이 보는 걸 나도 보고 싶기도, 그들이 아는 걸 나도 빨리 알았으면 하는 조급함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공감이 간 건 ‘맨해튼에 다녀오면 무척이나 피곤해진다‘라는 사실이다. 그곳에 나가면 온갖 감각을 총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낯선 냄새(후각) 사이로, 바쁘게 걸어오는 뉴요커들을 요리조리 피하고(감각), 사이렌 소리와 미친 듯이 클랙슨(청각)을 울려대는 택시를 뚫고, 영화 속에서 보던 아름다운 건물들(시각)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내 모든 에너지를 쏟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거기에 실전 영어까지 더해지니 뇌는 언제나 풀가동이다. 겨우 서너 시간밖에 있었을 뿐인데 침대에 지쳐 쓰러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해튼은 그 정신없는 혼돈 속에서도, 잇몸을 드러내듯 살짝살짝 뉴욕의 매력을 내비쳤다. 그 순간마다 이 도시에 빠져드는 묘한 중독성이 피어났다.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앞으로 나만의 뉴욕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지금은 그저 ‘혼란스러운 도시’. 그게 내가 처음 마주한 뉴욕의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