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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비결

이상형 리스트 30

by 김규리

아주 오랜 시간 나의 이상형을 생각해 왔다. 부모님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연인은 내가 선택한 운명이니까. 나는 타고난 팔자를 절반만 믿는 사람인데, 그 나머지 절반은 누가 내 곁에 있는지에 따라 삶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상형 리스트 30’이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있다. 목록에는 내 이상형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5가지, 더하면 완벽할 5가지, 그리고 나머지 20가지로 나누어 정리한다. 가장 상위의 필수 5가지는 없으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고, 거기에 더하면 완벽해질 부가적인 5가지 조건도 써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20가지는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조건이다.


리스트를 써 본 사람들 입에서 상상했던 이상형을 정말로 만나게 되었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사실 나는 이런 방법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 훨씬 전부터 내 이상형에 대해 재미로 써 온 글이 있었다. 단지 쓰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에, 원하는 게 있으면 늘 메모해 두었다. 내 기록을 찾아보니 한 3년 전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기록에만 없을 뿐이지 마음속으로 상상해 온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일은 이루어지기까지 이토록 오래 걸린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래전에 써 둔 이상형 리스트가 떠올라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에 조금 놀라웠다. (신기하게도,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미리 말하자면, 내 목록을 본 사람들 대부분이 이건 불가능하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잘생겼거나 돈이 많기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외국인이어야 하고, 한국어는 잘해야 하며, 대화가 잘 통해야 한다’라고 썼다. (외국인인데, 한국어를 잘하고, 말까지 잘 통하는 사람을 부산에서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가? 여기는 이제 노인과 바다란 말이다) 그 외에도 안정감을 주어야 하고, 나를 잘 받아주고, 음식 취향이 맞아야 한다. 아빠 같은 면이 있거나,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거나, 나를 귀여워하거나, 리드를 잘하고, 청결하고, 연락이 잘 되고, 긍정적이고, 사치 부리지 않고, 유머 코드가 잘 맞고, 경제관념이 있어야 하고, 등등…


요즘도 가끔 메모를 꺼내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나는 세 가지 빼고 모두 해당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이상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정말이다) 전 직장 동료는 그의 존재에 대해 듣자마자 첫마디로 “꿈을 이루셨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늘 주위에 말하고 다녔던 나의 지난날을. 한때 유행하던 시크릿, VD=R, 트랜서핑 같은 것들에서 입을 모아 하던 얘기가 있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편안하게 내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상황을 생생하게 상상하라는 것이다. 막상 내 이상형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생각만큼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감각이 더 컸다. 바라는 일이지만, 오히려 필사적이지 않아야 자연스레 일어나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연애가 행복의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나는 그랬던 것 같다) 바라면서 내게 일어난 일을 글로 썼다. 이상형을 그림으로 그려 몇 년간 간직했는데, 운명처럼 똑 닮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실제 비교 사진을 보니 그림 속 남자와 그녀의 남편은 수염까지 똑같은 색이었다. 만약 당신도 아직 나만의 인연을 찾고 계신다면, 돈 드는 것도 아니니 ‘이상형 리스트 30’을 한 번 작성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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