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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Jan 11. 2024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읽고, 생각하고, 이젠 쓰는 사람으로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지금처럼 책이 많지 않았다. 엄마가 구해주신 책들을 반복적으로 읽고 또 읽었다. 전집 한 질이 들어오면 책상에 걸터앉아 한 권을 읽고 책꽂이에 꽂아놓고, 또 다른 한 권을 읽고 그자리에 넣고, 그렇게 책상 앞에 나만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었던 어린시절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있다. 위인전을 읽으며 '나도 이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생각했고, 자연관찰책을 읽을 때는 '세상에 이런 풀, 벌레, 곤충, 식물들이 많구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아파트에 전집아저씨가 오시는 날이면, 엄마는 전집 한 질을 챙겨 내가 읽고 싶은 책들로 교환해 주셨다. 그러면 또 난 책상에 걸터앉아 쉼 없이 책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독서를 즐겨하시던 아빠는 특별한 날엔 꼭 서점에 데리고 가주셨다. 서점에 가서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딱 한 권만 사주셨다. 책을 고르는 그 시간이 행복했고, 그 행복을 선사해 주는 아빠가 근사해보였다. 나도 어른이 되면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소중한 사람에게는 책을 선물하는 어른이 되었다.  

여행이 가고 싶지만 지금 당장 떠나지 못할 때는 여행책을,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고군분투하던 때엔 육아서를, 좀 더 아이가 커서는 어떻게 아이들을 건강하고 훌륭하게 키울까를 고민하며 교육서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에세이를, 분야에 맞는 책들을 찾아 읽고 생각하며 읽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내가 참 좋았다.

읽는 어른에서, 이제는 쓰는 어른으로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난 글을 쓰는 이가 되었다. 사각사각 연필을 잡고 써 내려가는 그 시간이 좋았고, 타닥타닥 자판기 소리가 무르익어 가는 그 시간이 참 감사했다. 그 시간 안에서 예전에는 몰랐던 글쓰기의 치유의 힘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글 쓰는 매력을 알아가는 때쯤. 다시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읽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알게 된 건 독립서점을 탐방하면 서다. 강화도에 "책방시점"이라는 서점에 탐방을 갔다가, 작가님의 북큐레이션이 인상 깊어 집으로 데리고 왔던 책. 연두빛깔의 그 책을 고른 건, 아마도 내가 글을 쓸 운명임을 암시하는 게 아니었을까? 처음 읽었을 때는 깊게 와닿지 않는 내용들이라 흘려 읽었는데, 쓰는 독서모임으로 두 번째 읽게 되면서 좀 더 깊이 있게 읽게 되었고, 이제 이 책은 겨울철 붕어빵, 군밤과 같은 내 삶의 소소한 간식 같은 책이 되었다. 글쓰기로 인해 마음이 답답하면 곁에 두고 종종 찾아 읽게 될 책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달라진 내 삶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일상에서 스치고 지나갔던 모든 일들은 글감이 되었고,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그냥 흘러가는 말들이 아닌 생각주머니에 차곡차곡 담겨, 더 좋은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만들어졌다. 사소한 일들은 사소한 게 아니었고 소중한 것이었음을 알았고, 그 소중한 일상들을 글로 풀어내면서 쓰는 시간들은 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로 인해 마흔을 앞두고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꾸준히, 계속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꾸준히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아이들의 학원라이딩 사이의 시간들, 집안일을 하며 한숨 돌릴 때, 잠자기 전, 틈틈이 읽는 것은 되었지만, 틈을 내어 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반 모임에 들어갔고, 모두가 잠든 새벽시간을 이용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력하면 이루어낸다는 말처럼, 나는 글을 쓰기 위한 틈을 만들어 내었고, 그 시간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한 줄 두 줄, 발행하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글들이 흘러넘쳐가는 나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는 이 모든 글들이 딸깍 소리의 발행버튼을 만나,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날들이 오리라 스스로 되뇌었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강의도 하고 애들도 키우고 그렇게 바쁜데 도대체 언제 책을 쓴 거냐고. 그러면 나는 수업을 하고 글을 썼기 때문에 양육과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람과 책과 글쓰기가 주는 힘의 최대 수혜자인 나는, 수업 첫날 "살려고 왔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이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안다. 어떤 글쓰기는 사람을 살린다. 적어도 쓰는 동안은 삶을 붙든다."            -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중에서...


쓰는 삶이 주는 힘은 상당했다. 쓰기 위해 더 열심히 책을 읽었고, 더 깊게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정리해서 나누었고, 다시 써 내려갔다. 유유히 흘러가는 돛단배처럼 정처 없이 살아갔던 삶이, 쓰기라는 나침반을 만나 방향을 잡고 속도를 내었다. 이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아이도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은 수년째 일기를 쓰고 있다. 첫째는 8살부터이니 이제 만 4년을 채우고, 5년째에 접어들어 며칠 전부터 10권째 일기장에 자신의 일상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틈틈이 학교에서는 3줄 글쓰기, 독후감 쓰기 등을 하니 아이들의 쓰는 양이 상당하다. 아이들이 이 쓰는 삶의 참맛을 잃지 않고, 쭉 쓰는 어른으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람이 더해졌다. (언제는 읽는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란다고 하지 않았나! 점점 욕심이 과해진다.) 아이의 일기장은 혼자만의 소리 없는 외침이 아니라, 이순신장군이 세상에 난중일기를 남겼던 것처럼 책임감이 막중하다. 우리 가족의 역사집이다 보니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엔 읽어보시라 권하기도 했고, 엄마랑 티격태격 말싸움을 한 날에는 보란 듯이 책상 위에 펼쳐두고 자신의 죄 없음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가끔은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 사과 편지를 남겨두기도 하며,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어 놓기도 했다. 아이는 그러면서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아는 것 같았다. 생각이 깊은 첫째는 나보다 한 수 위다.





 내 꿈은 이쁜 딸을 낳아 나와 딸과 어머니, 엄마 여자 3대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와서 걷기 여행책을 내는 것이었다. 인생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던 그것은 아들만 둘인 지금의 나에게는 실현가능하기 힘든 일이 되었다. 그때는 쓰는 사람은 아니었던 지라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산티아고를 동경했고 관련된 책을 읽어나가며, '아! 나도 책을 낼 수 있겠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남편이 되었든, 아들이 되었든, 아니면 나 혼자든,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올 것이다. 다녀와서는 꼭 내 이름을 건 책을 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처럼 매일 같이 쓰고 지우 고를 반복할 것이다.


은유작가님의 말처럼,

최상의 글쓰기가 아닌 최선의 글쓰기를 위해

오늘도 나는 쓴다.

아무튼 나는 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내 자신을 돌아보며

쓰고, 또 써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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