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 큰 구멍이 당연히 나는 주는 걸 나에게는 주지 않는 사람과 연결되게 만들었다.
혹은 당연히 나는 주저하는 것을 나에게는 전혀 주저하지 않는 사람과 연결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 그 관계들이 끝날 때마다, 온갖 전쟁끝에, 결국엔 합리화 했다. 그 사람 덕에 고마웠다. 그 사람 덕에 이걸 배웠다. 그 사람 덕에 내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구원자와 신을 향해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처럼. 나는 내 옆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내 삶의 의미와 감사를 부여하며 내게 쌓인 독을 빼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먼저 과거를 굳게 해버린 것이다.
나는 이런 관계를 사이비 인간관계라 부르려고 한다. 사이비 인간관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 관계에는 내가 없다. 정말 ‘나’가 없다. 이 사람들이 보는 나는 ‘나’가 아니라 ‘자기가 믿는 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람의 ‘나’도 없다. 내가 보는 그 사람도 그 사람이 창조해낸 믿음 안의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뭇 내가 우월감에 가득 차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왜냐면 사실 우리 모두가!! 정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아니 심지어 나 스스로도 나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 맹목성이 ‘사이비 인간관계’에서 도드라지는 이유는 그 사람은 마치 나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지. 자기가 하는 행동이 100%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던가. 자신의 선의가 반드시 내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이비 인간관계 안에서는 내가 그 사람을 더 탐색하려는 시도, 그 사람이 나를 더 탐색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더라도 좌절되고, 철저히 서로와 서로를 향한 시선은 가려진 채. 너와 나 사이의 맹목적인 관계성 만이 그 사이 가운데에 차곡차곡 세워진다.
Point. 이런 관계가 끝나고 나서 공허함을 느끼고 오랫동안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세상은 불확실한 것으로 가득차있는데, 그 사람과의 관계만큼은 확실한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확실함이 거짓으로 밝혀진 다음에도, 내가 확신이 없어서일거야 라고 자책한다.
사이비 인간관계에는 묘한 불안과 긴장이 따른다. 끊임없이. 언제나. 자기가 생각한대로 의도한대로 내가 이해해야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나의 생각이나 입장과 다른 솔직한 말을 하면 ‘아 맞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기 보단 ‘그건 오해야’라고 말한다. 혹은 ‘나를 왜 그렇게 바라보냐‘며 화낸다. 이 오해의 견고함은 정말로 강해서 내가 ’아 맞지 내가 생각하는게 다 정답도 아니고 내가 너무 판단적이었다’ 하고 그 사람의 정답을 이해해줘야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가끔 나를 오해한 상대방을 당연히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럼 자기 생각을 더 한 번 이야기해본다거나. 상대방의 오해를 풀기 위해 나의 솔직한 생각을 더 드러내 설득을 시도하면 된다. 하지만 사이비 인간관계에서는 그런 방식은 불안정하고 날카로운 것처럼 보여진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내 생각을 말하기에 앞서 그 사람의 의도와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만 해도 그 사람은 날이 서고 나를 ‘잘못했다‘고 바라보는데 말이다. 사이비인간관계에서는 솔직함은 없고 오해만 있다.
Point. 점점 내 솔직한 생각은 줄어든다. 마음 속 불안과 갈등은 쌓인다. 점점 난 지친다. 그런 나를 훗날 후회한다. 왜 내가 그때 더 진심이지 못했을까. 왜 내가 그때 나 스스로를 더 돌봐서 마음을 더 주지 못했을까. 그때 내가 왜 더 이해해주지 않았지? 이 생각들은 원인이 아닌 결과다.
사이비 인간관계에선 이 사실을 까먹는다. 나는 지금까지 잘 생존해왔다는 사실. 이 관계 안에서 나는 나의 약점이 채워진다는 느낌을 느낀다. 옷을 대충 입는 내게 옷을 선물해준다거나. 집이 더러운 나를 위해 집을 정리하는걸 돕는다거나.
이런 좋은 마음 주고받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생존적 주고받음만이 관계의 ‘특질‘이 될 때 문제가 된다. 내가 이 관계 바깥에서 잘 쌓아온 ’나 자신‘은 외면되지만, 내가 좀 잘 숨겨왔거나 혹은,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온 취약점들만이 이 관계에선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완전해진 느낌이라거나, 내가 받아온 그 어느 사랑보다 이 사람의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약한것을 있는 그대로 두질 못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니 난 괜찮은데 왜 자꾸 이런걸 해주는거야? 별로 안고마운데‘. 그리고 또 생각한다. ‘아 진짜! 어떻게 너 이런 고마운 사람한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내가 하지 못했던걸 해주고 있잖아!’
나와 약점을 공유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했던 친구들은 마치 아직 약점을 채우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남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점점 까먹는다.
Point. 나름 나의 불완전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은 이 관계가 끝나고 난 뒤 조금은 감사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감사함조차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 사람이 떠나간 후 남는것은 내 약점이 보잘 것 없어서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수치심이기 때문이다.
‘ 너 또 그 사람을 탓하고 있구나? ’
난 이 생각을 합리화로 잘라내버리고 싶다. 아니 나는 그 사람을 탓하고 있는게 아니라 그 사람이 너무도 당연하게 했던 거짓말들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안다고 확신할 수 없을 것이고,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가 나를 잘못 이해했다고 아무런 솔직함 없이 그 사람을 탓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누군가의 약점을 돕고 돕고싶어질 순 있어도 그걸 받아들이는건 철저히 그 사람의 몫이라는걸 인정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관계속에서 속으로 설레고, 속으로 기대하고, 속으로 행복에 겨웠을진 몰라도. 나의 그 반응만이 적절한 반응이라는걸 그 사람이 마음대로 기대하거나, 마음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를 다 알지 못하면서 다 아는 척 했던 그 사람이 밉고. 솔직한 모습으로 소통하려고 하는 나를 오해라고 말한 그 사람이 밉고. 내 약점을 지우거나 고쳐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 밉다. 한 없이 가벼운 확신만을 관계 내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 놓은 뒤, 정작 그게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임을 증명하듯 무겁게 고민하던 나를 가볍게 떠나버린 그 사람이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