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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Sep 05. 2024

나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상담 기록 

나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내게 먼지보다 못하다고, 어제 친구들과 있는 데에서 말을 했다. 



오랜만에 새벽까지 술을 마시니.. 그러고 휘청휘청 걸어가 잠시 지나가던 지하 벤치에서 다른 사람들도 자길래 한 시간쯤 자고, 프리미엄 버스를 타면서 편하게 자고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에 온 이유는 친구들과 늦게까지 있다가 광천에 갈 기차가 없어서도 있었지만, 어차피 3시까지 아예 버스도 없을 정도로 늦어버렸기 때문에 그 이유는 무의미해졌고. 그런데도 그냥 나는 아무 생각없이 기차역보단 터미널로 갔다. 그러나 결판이 기다리고 있었던 건 지난 주 충치치료를 위해 치과를 갔다가 받을뻔 했던 신경치료였다. 신경을 다 뽑아버리는 그런 시술을 '아 이거 신경치료 해야해요' 말만 해버리고 그냥 해버리는 의사의 가벼움이 참 무섭다. 1차 때는 신경은 안파고 이빨만 판 것 같아서, 전화로 직원과 신경치료 받지 않고 그냥 떼울 수 있냐며 십분 넘게 말로 다퉜고. 오늘에는 반드시, 의사의 말을 거역해서 이빨 신경이 아프면 내가 그 때 신경치료를 받지 라는 심경으로 신경치료를 받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다투는 첫 시험대였다. 



나를 위해 다툰다라. 


난 요즘 꽤 잘 지내기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쉬거나 누워있는 나 자신의 꼴도 더 이상 자책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나를 자책하고 혐오하는 건 너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느끼는 마음인 것 같다. 네가 지금 쉬고 있으면 너의 부모님은 어쩔건데. 너가 지금 쉬고 있으면 지금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는 니 친구들은 뭐가 되는데. 너가 지금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쩔건데. 그 작은 한 마음자리에서 정말 온갖 갖가지 생각들이 올라오게 되는 것 같다. 그게 나를 끊임없는 애씀과 인정에 대한 분투로 이끈다. 결국 내가 나를 인정해주면 되는건데 말이다. 내가 나의 그 때 그 때 있는 꼴 그대로를 봐줄 수 있으면 되는건데. 서서히 내게로 뿌리가 가기 시작했다. 남을 위해서만 다툴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그 시선을 드디어 남에게서 거두고. 나 자신으로 시선을 옮겨. 여기서 내가 나 자신을 한 번이라도 자책하거나 혐오하면 나는 정말 져버리고 마는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버티기시작했고. 그 힘의 작용은 드디어 내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내 안에 뿌리가 박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 서울에 간 겸 받았던 상담에서, 상담 선생님은 날 한 번 더 시험했다. 보증금을 3개월째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어떤 법적 조치도 하지 않고 그냥 견디고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나는 내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주변의 조언을 받으며, 물론 화도 호랑이 처럼 내보고 문자로 자살하고 언론에 보도할거라고 협박도 해보고 하면서 내 나름의 거친 방법도 사용했지만, 대긍정의 고수 종인스님은 그냥 그 집에 가서 살아버리라고. 법우님 어차피 서울에서 대학원 갈거니까 그냥 그 집에 계속 살라고. 그래서 집 주인에게 계속 살아버리겠다고 했더니 집 주인의 마음이 누그러지더니. '그래 총각 그냥 살아' 지가 내 돈 안주고 있으면서 마치 선심쓰듯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결과, 그 다음 날 또 전세등기를 신청해야겠다고 말하니 집 주인은 그냥 돈을 줄테니 이 집에서 나가라고 집주인은 말했다. 이제 자기도 지긋지긋해서 전세 안구하고 월세 구할거라고. 집주인이 스스로 내가 빨리 나가는게 자신에게도 이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난 나름 기다림의 묘를 잘 살렸다고 생각했고, 굉장한 스트레스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힐뻔한 상황에서 나 자신을 평온함으로 구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실제로 일단 5천만원을 받았고, 남은 3천만원만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이것도 부글부글 화가 날 상황이지만) 




하지만 상담선생님은 내가 계속 그런 방식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갈등을 회피한다. 그래서 자꾸 나쁜 사람이 늘어나는 것 아니냐고. 그렇지. 나는 이런 집주인같은 케이스가 생길 때마다 다음에는 제대로 다퉈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단, '에이 내가 더러워서 이제 전세 안구한다' 식으로 내 삶의 방식을 더 좁히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에요. 제가 현명하게 대처한거라고요. 남들은 그런 스트레스에 허우적 대며 사는데, 저는 그런 스트레스를 최소한으로 받고 문제도 해결했다고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건 내 안의 누군가가 하는 말이었다. 상담선생님은 칼을 그 누군가에게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더 곰곰히 나는 생각해보더니. '제가 모든 것에서 제 책임을 찾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전세사기도, 내가 애초에 전세대출금 받아서 싼 값에 전세 집 살려고 했던게 나의 책임이야. 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생각은 앞으로 더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꽤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자기 분수에 맞는 선택을 해야 나중에 화를 당하더라도 내게 피해가 크지 않은건 확실한 것 같기 때문이다. 돈을 좀 더 쓴다고 생각하더라도 월세를 보증금 저렴하게 구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사기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기에. 




상담 선생님은 내 마음을 이해해주기도 한다. "악업을 선업으로 갚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죠. 그런데 이번 전세사기에서 상혁씨의 모습은, 악업을 선업으로 갚는 것이, 그게 진짜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상혁씨에게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건 다르죠. 악업을 선업으로 바꾸더라도, 내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것과 없는 상태에서 마지못해 하는 건 다른 거잖아요." 그리고 내 삶 전반의 문제가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나를 위해 싸우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죠. 제가 살면서 뭔가 저를 위해 당당하게 주장하면서 갈등을 끝까지 해결한 경험이.. 별로 없는 거 맞는 것 같아요." 한 편으론 나는 그래도 남을 위해 주장하고 싸웠던 것은 많이 해왔기에, 만약 그 포커스만 나 자신으로 옮긴다면 내가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담선생님도 드디어 이제 내가 나 자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기에 이런 오랜 나의 대응 패턴에 도발을 하는 것이겠지. 실제로 나는 그 '갈등을 회피하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을 겪었다. 남들은 나보다 현실적인 대처를 잘할지 몰라도, 나는 그 현실을 뛰어넘어 더 나은 현실을 만들고 버티는 능력이 있어. 라는 내 안의 우월감이 무너지는 느낌. 이게 유용할 때도 분명 있지만. 무조건 적인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화를 냈던 순간들을 생각한다. 2달 전 늘 나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엄마에게 거침없이 화를 내봤던 경험. 집주인에게 호랑이가 포효하듯 화를 내봤던 경험. 그 화의 에너지는 엄청났다. 그 화를 내기 전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화를 재잘거리는 짜증정도로 애매하게 표현해왔던가. 그 화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남이라는 존재를 덧붙여왔던가. 애초에 남을 덧붙여 화를 낸다는 것은, 사실상 내 화를 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화에 내가 자신이 없으니까 그냥 맘 편하자고 남을 들먹이는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내 화에 자신을 갖자. 재잘거리는 짜증정도로 화를 내서 사람을 밀어내지도 말고. 거침없이 포효하는 화로 사람을 없애버리지도 말고. 그 화를 내 안에 잘 있게 해보자. 그 화의 힘으로 가끔은 내가 정당함을 증명해야할 때가 있다. 내가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고 그 사람이 나를 엎어뜨리고 두들겨 팬다면. 적당한 사람에게 적당한 때에 나는 화를 낼 수 있고, 화를 이용할 수 있고, 그 갈등을 끝까지 해결하려 노력할 수 있다.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또한 그 사람에게 잘못된 행동을 교정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상담선생님은 덧붙인다. 스님과의 상담으로,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이유로 나의 화와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자꾸 누르는 것을 이제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상담선생님은 판단하셨나보다. 나는 약속했다. 앞으로 이번 전세사기와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절대 다시 이런 식으로 대처하진 않겠다고. 내가 할 수있는 조치를 해서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해결해보겠다고. 나의 온순함과 회피 때문에 내 주변사람들이 스트레스 받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갈등을 맞서려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기는게 아니라,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라고 상담선생님은 이야기했다. 




내 한 몸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 난 치과의사와 대면해야 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신경치료를 해야한다고 말해도. 나는 내가 정당하다고 믿는 것. 아직 아프지도 않은데 내 이빨의 신경을 다 없애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버텨야만 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적당한 분노의 활용이었다. 환자의 몸을 의사의 권위로 좌지우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마음 속의 분노를 견고하게 유지하여 지켜낼 것. 끝까지 환자인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냥 그 치과를 나가버릴 것. 근데 생각보다 바로, 전화로 이야기했던 직원과는 다르게 의사분은 하지 않겠다면 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냥 떼워주겠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그 분노를 바로 아래로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분노를 마음 속에 붙잡아 놓는 연습이었다. 마치 돌덩이를 들고 버티는 연습과 비슷하다. 분노에 휩쌓여 늘 돌덩이를 들고 사는 것은 고통이겠지만. 돌덩이를 나르거나, 누구를 향해 던질 수도 있을 상황에서는 마땅히 돌덩이를 들만한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보호하고, 필요하다면 공격도 해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 




한국사회는 참 적당하게 분노를 표현하면서 갈등해결하기 어려운 사회같아요. 나는 나 자신만 그걸 못하는게 아니라는걸 상기하고 싶어 상담선생님께 말한다. 갈등을 해결하려고 분노를 표현했다가 그 분노에 아예 휩쌓여 자기 안에 갇혀버리거나. 뭐 사회성이니 뭐니 하는 말들로 정당한 표현들과 대처를 억압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담선생님은 바로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게 무슨 사회성이 좋은거에요. 좋은 사회성은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거죠. 맞아요 맞아. 사회성 운운하며 남의 고유함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무식한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그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내가 한발짝 더 나아가 그런 방식으로 갈등을 회피하는 그런 사람들의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도 있어야겠구나.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내 에너지를 쓸지 말지를 선별할 지혜가 필요하니, 어찌보면 나는 갈등을 해결할 결심을 먹기 전에 그 지혜를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갈등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갈등을 구분할 지혜. 적당히 넘어가도 저절로 해결되는 갈등과, 본때를 보여줘서 누가 정당한지를 겨뤄야 하는 갈등을 구분할 지혜. 나는 반드시 이런 식으로 내 그동안의 삶을 아예 부정하지 않을 방법을 찾는다. 결국 모든 시간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이제는 갈등을 회피하지 말자. 나의 화와 나의 분노를 존중해주자. 나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할 때는 끝까지 갈 각오로 싸우기도 하는 그런 떳떳한 삶을 살자. 그 마음을 먹고나서 나는 더 당당하게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먼지보다 못한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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