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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Sep 05. 2024

틈새전략


글방사람들이 말하는 글쓰기 딜레마가 있다. 인생이 힘들면 글이 잘써지는데, 인생이 평탄하면 글이 안써진다. 




오늘도 이웃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아저씨가 해주신 짜장밥. 어제는 짜장이 진득진득하니 찐한 맛이 맛있었는데 오늘은 호박인지 감자인지 야채의 물이 좀 더 들어가 밥에 잘 섞이는게 일품이었다. 여느때처럼 얼음 넣고 차나 커피를 마시고. 오늘은 좀 일찍 집에 간다고 했다. 




집에 평소같았으면 곧장 걸어갔을텐데. 2일 전에 친구가 광천에 놀러왔다. 친구와 밤 산책을 하며 나는 말했다. "00야 내가 평상시에 혼자살 때는 밖에 나가도 노래나 듣고, 뛰기나했지. 이렇게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산책은 거의 잘 못하게 되더라...너처럼 이렇게 친구가 올 때마다 새로운 게 내 삶에 추가되는 느낌이야. " 



그래서인지. 나는 여유를 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틈새를 냈다. 집에 가기 전에 잠깐 한 바퀴 주욱 산책하고 오자. 









틈새 1


쌈채소 농장에서 일할 때다. 내가 묵는 숙소에서 쌈채소 농장까지 가는 짧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은 내가 대학생때 이 곳에 농활에 와서 개같이 일하다가 빨리 쉬고싶어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올해 다시 이 곳에 와 일할 때는. 내 삶에 틈새가 너무 필요해서였을까? 짧은 길을 놔두고 굳이 크게 삥 돌아가는 큰 길로 걸어갔다. 나는 그걸 '큰길로 걷는다'라고 표현했는데. 그 길로 걸어가면 정면에 오서산 풍경에 확 펼쳐진 하늘과 구름이 정말 멋졌다. 그리고 오른 편으로 쭉 내가 일하는 곳이 속한 권역이 한 눈에 보였으므로. '나는 일찍가는 것보다 이런 여유를 더 즐긴다네'하고 자랑하는 느낌도 났던 것 같다. '빨리 돌아가야지'에 순응하는 선택과 '큰 길로 돌아가며 즐겨야지'에 순응하는 선택 그 사이에 자유가 있었다. 




틈새2


또 쌈채소 농장에서 일할 때다. 집주인이 한참 돈을 계속 안돌려주고 있었던 때다. 나는 점점 떨어지는 잔고에, 벌리는 돈은 하나도 없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점점 더 걱정하고. 커다란 스트레스를 한 켠에 놔둔 채 마음 속 우주로 도피한 상태였다. 하지만 늘 그 집주인과의 갈등이 나를 다시 지구로 돌려놨다. 그렇지만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싶은건 최대한 그 미움과 분노로부터 멀리 떨어져 한시라도 빨리 중력을 벗어나 우주에 다시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난 집주인과 연락할 때마다. 은행에서 연락이 올때마다. 한 숨을 크게 푹 쉬고는 매일매일 돈도 받지 않고 하고 있던 노동으로부터 당장 벗어났다. 그렇게 걸어가, 저수지를 돌아가, 날라다니는 새에 시선을 빼앗기고, 낚시꾼들의 풍류를 구경하고, 더 돌아가, 가끔은 손에 커피 한잔을 쥔 채로. 내가 다시 중력처럼 쌈채소 농장으로 제발로 걸어갈 때까지 최대한 버텼다. 그럼 다시 차분하게 맨발로 흙을 밟으며 쌈을 딸 평온함을 되찾곤 했다. 



틈새 3


나를 가장 무너뜨렸던 그 해, 나는 출구없는 자책 속으로 한 없이 빠질 뻔 했다. 그러나 참 용하게도 나는 그때 인도를 가기를 선택했다. 지금 해석해보면 가장 무너졌기 때문에 가장 최저선을 무너뜨릴 결심을 그 때 나는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때 새내기였던 후배가 중도 휴학을 하고 내 인도 여행을 따라왔고. 그 친구는 지금 내게 형제와도 같은 친구가 되었다. 나를 무너뜨린 사건이 없었다면 그 친구도 없었겠지. 가끔씩 그 일을 회상하며 내가 오히려 감사해하는 이유다. 





더 많은 틈새들이 내 삶에 있었다. 그러나 다시 화제를 글쓰기로 돌려놔야겠다. 내가 전주에서 광천으로 올 때 익산에서 환승한다. 익산에 환승하는 기차가 7시기차가 있었고 8시기차가 있었다. 7시 기차는 8000원, 8시 기차는 5000원 이었다. 아무리 내가 돈이 없어도 시간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7시 기차를 타는게 가성비가 맞았다. 하지만 난 귀신같이, 8시 기차를 5000원에 예매하고, 나머지 3000원으로 이디야에서 아샷추를 시키고 글 하나를 뚝딱 썼다. 똑같은 8000원이었지만 덕분에 글 하나를 쓸 수 있었다. 



쌈채소농장에서 나는 인간관계에서 갑갑했다. 아무한테도 외부인이었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밀도높은 내 삶에서 꽉 차버린 생각과 감정들을 그냥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틈만 나면 글을 썼다. 글을 쓰기 위해 주변 마을 카페에 가고. 글을 쓰기 위해 그 곳을 벗어났다. 그러다 이 곳 광천의 평지교회도 다시 찾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글은 현실화 되지 않은 나만의 대안현실을 하얀 배경에 까만 활자로 실현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힘든 일상 속에 글이 잘써진다. 글쓰기 자체가 내가 사는 현실의 틈새를 열어재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 까만 것들을 쏟아붇는 것이기 때문이다. 



틈새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 계속 글을 쓰게 된다. 안에 교집합이 많은 두 원을 내 한 몸안에 쑤셔넣기 버거워 나머지 원을 꺼내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더 넓게 생각해보면. 내 삶은 애초에 수많은 원들이 주변에 펼쳐져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오늘 내가 이웃집에서 밥을 먹고 산책한 현실이 사실 그 이전에도 매일 있었을 것처럼. 틈새를 살아간다는 것은 일직선 처럼 보이는 삶에 다른 길을 내어 삥 돌아가는 큰 원을 하나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 큰 원이 얼마나 큰 지는 가늠할 수 없다. 시간적으로는 단 몇 초가 될 수도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글쓰기가 틈새를 만들어낸다면, 어쩌면 틈새에서 글이 생겨날 수도 있다. 내가 이미 바깥에 있는 다른 원이라는 틈새를 잠시 살아갈 때, 그 현실이 내게 설명하는 검은 활자의 배열이 내게 강림하듯 쏟아진다. 그리고 다시 삥 돌아 삶이라는 일직선에 왔을 때, 나는 그 살아간 현실을 글로 적어낼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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