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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Sep 08. 2024

이야기 하다만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난생 처음으로 다니는 교회 1 

일요일은 교회 예배날이다. 참고로 나는 지난 6월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우리 아빠는 한국 교회를 무척 싫어하신다. 외가댁에 목사 이모부가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땅 권리를 자기로 옮기도록 해서 땅을 빼앗아갔다는 이야기부터. 교회다니는 새끼들 다 사기꾼이라고. 난 그럴만 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믿으세요~ 했다가 안 믿는다고 하면 표정 싹 변하는 교인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친절을 베풀었다가 그에 상응하는 반응과 보답이 오지 않으면 오싹해지는 사람들을 나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모습에서 사랑을 발견할 순 없었다. 



그런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는, 말하자면 복잡하고 길지만, 심플하게 말하면 이 곳 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 덕택이다. 평상시에는 성경말씀을 안하는 목사님. 그 대신에 온갖 자신이 아는 조선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신다. 가끔 뭔가 힘든 일이 있다고 말하면, 오지랍을 부려 자기가 해결해주려고 하기보단 자신은 그 자리를 비우고 '나 어디 다녀올테니까 상혁이는 저기 꽃 좀 보고 있어'라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그 위로를 맡기시는 목사님. 맨발로 교회에 처음 들어갔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고 집 들어오면 가장 먼저 발먼저 씻는다더라고.' 하면서 바로 이해해주는 사모님. 십일조를 하라는 어떤 사람 앞에서 '지금 돈도 못받고 일했는데 무슨 십일조여'하시는 사모님. 반찬을 해주시고는 남겨진 반찬들을 교회 냉장고에 보관해서 오래토록 먹으니, '누가 줘도 맛 없으면 그냥 버려도 괜찮아. 나도 선물받는거 맛 없으면 고맙다고만 말하고 다 버려'해주시는 사모님.



교회를 떠나서 애초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을까 싶었다. 이 분들의 특징은 귀신같이 서로의 영역을 지킨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꽤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목사와 목사 사모님쯤 되었으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시선을 뺏는 인사를 할 법도 한데, 절대 내가 뭘 하고 있을 때 자신들이 왔다고 내가 자신들을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우주 안에서 신실한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걸어갈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목사님은 때로는 도전적이시기도 하다. 일단 얼마 전에 내게 신학대학원에 가 목회활동을 하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목사님은 나를 두고 '상혁이가 신통혀' 라고 하신걸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마을에 발을 딛자마자 바로 집에 큰 냉장고가 없으니 교회 냉장고를 쓰고, 근데 또 마주하는 사람들 심부름도 곧잘 하고, 과일이 생기는게 있으면 냉장고에 나누고. 그렇게 나누다 보니 또 계속 반찬이나 이런 것들을 받고. 사람들이 주는 것에 부담을 갖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나눔의 장'으로 만드는 지 잘 알고있는 듯한 모습에 그렇게 느끼셨던 것 같다. 보통의 사람들은 받는 부담에 짖눌려버리거나. 주는 억울함에 쫓겨살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 스스로도 내가 기나긴 고민과 주저함 끝에 죄책감과 억울함 사이 그 빛 한 줄기의 길을 나름 발견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오늘은 예배에 가지 않고 광천에 놀러온 친구와 밥을 먹고 마중을 나가려했다. 그 대신 젊은 사람의 손이 필요할테니 아침 일찍 친구와 함께 교회에 가 꽃 화분을 교회에 옮겨다가 드렸다. 목사님은 당연히 친구가 반가웠을 것이다. 그리고 예배에 참여해 같이 찬송도하고 기도도하고 또 자신이 그 친구의 앞날을 위해 기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목사님은 이번에도 도전했다. 나는 굳게 오늘은 예배에 가지 않고 이 친구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잘 기차타고 가게 보내주는게 나의 사랑이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건만. 목사님은 그 친구와 나를 예배에 참여시키고 싶어 아침을 교회에서 먹고 가라고 우리를 붙잡으셨다. 포인트는 교회에 해놓은 밥이 없었다는 것 ㅋㅋ 그래서 목사님은 교회 부엌이 있는 세미나실에 있는 여성 집사님들에게 밥좀 해달라고 말했다ㅋㅋ 나는 내년에 6개월간이나 세계여행으로 이 곳을 떠나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거절할 작정이었다. '당신이 아무리 나를 예배에 참여하게 하려고 해도, 나는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때문에 여느 한국의 교회처럼 나를 괘씸하게 여기고 그렇게 대한다면, 나는 이 곳을 당장 떠날 수도 있습니다' 라는 단심을 마음 속에 품었다. 그래서 손사래를 치며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고 '아이구 아니에요 ㅎㅎㅎ 이 친구 교회 예배같은거 별로 해본 적도 없어서. 좀 있다 저녁 예배때 올게요!' 라고 말하고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기가 잡고싶은거면 밥을 자기가 해줘야지! 거기에 더해 나는 그 날 나눠주는 떡까지 받아갔다. 목사님은 하늘을 건 도전 끝에 결국 포기를 하시고는 아무 말 없이 늘상 소리없이 사라지는 곳으로 사라지셨다. 



"ㅋㅋ 괜찮아. 목사님은 도전하실 건 도전하시는 분이라. 저렇게 해놓고 또 다시 괜찮아지시는 분이야" 

괜히 미안해하는 친구에게 나는 안심을 시킨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이 자유롭지 않았나보다. 처음으로 광천에서 맞이하는 예배없는 일요일 오전에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나는 기독교와 자유에 대해 실컷 주저리주저리 거렸다. 




십일조라는게 말이야. 사람들이 십일조를 하면 기명으로 하기도 하고, 무기명으로 하기도 해. 근데 딱 생각했을 땐 기명으로 하는게 이익인 것 같잖아? 근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무기명 십일조가 내게 더 이익이야. 왜냐하면 기명으로 십일조를 하면, 교회에서 어떤 방식으로건 그 십일조를 한 사람에게 갚게 되어있거든. 그게 더 친절하게 대하는 방식으로건, 선물의 방식으로건. 혹은 더 떠받들어주는 방식으로건. 그럼 그 사람은 거기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어. 떳떳한게 없거든. 아무리 돈을 계속 바쳐도, 그게 이름이 밝혀지는 한 어떤 방식으로건 그 보상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어. 그 사람은 딱 거기까지 만족하는 사람인거야. 하지만 무기명으로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본 모습이 드러날 것아냐? 누군가는 십일조를 하지도 않는 그 사람을 비난할 수도 있고. 함부로 대할 수도 있겠지. 그럼 그 꼴을 다 봐낸 그 사람은 선택할 수 있는거야. 더 나은 곳을 떠나야겠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겠다. 그럼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마련이거든. 그 사람은 계속 좋은 마음을 내며 상승하고 있었던 거야. 다른 사람들이 사람들의 반응과 보답에 기대하며 거기에 파묻혀 살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더 큰 선물을 바라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떳떳하게 자기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어. 누가 뭐라하든, 자기는 알고 있거든. 이 교회에 머물면서 자신이 어떤 좋은 마음을 냈었는지 말이야. 누군가가 그걸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 사람이 계속 상승해서, 언제든지 자기에게 더 큰 선물을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만의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자유이자 이익인거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꽤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고 나는 느꼈어. 예전에 어떤 글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기대할 게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라'라는 의미라고 적혀있었거든. 나도 그런적이 있어. 내 주변에 있는 사람한테 아무리 내가 좋은 마음을 베풀어도, 그 사람들에겐 기대할게 하나도 없었거든. 그러다보니 내 정신이 상승한다는 걸 느꼈어. 작은 햇빛과 꽃향기에도 큰 행복을 느끼고. 살아남기 위해 달리기와 같은 좋은 습관을 실천하고, 그 곳에서 벗어나 더 큰 행복을 바랄 수 있는 꿈을 꾸기 시작했지. 만약 내가 내 주위의 점과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만족하며 살았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들이었지. 그니까 기독교 로직은 이런거야.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냥 주위의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약한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것에 만족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냥 베풀고 싶은 마음 그 자체로 강한 마음으로 베푸는거지. 그럼 그 강한 마음 속에서 그 사람은 더 높고 좋은 행복들을 누리고 발견하게 돼. 만약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가 닫힌 사회라면, 그 사람은 그렇게 계속 상승하다가 좌절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사는 사회가 열린 사회라면, 그 사람은 그렇게 상승하다가 결국 더 좋은 곳에 떨어지게 될거야. 더 풍요롭게 더 누릴 게 많은 곳으로. 사람에게 기대하는게 아닌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사람의 결실인거지. 




내가 정말 아직 하나님을 믿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오래간만의 일요일 오전의 여유가 내게는 불편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목사님 대신 그 친구에게 기독교와 기독교적 자유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나와 그 친구의 보이지 않는 끈이야 말로 교회, 즉 이끌레시아 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고 강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나는 언제나 떳떳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맞는 광천에서의 일요일 오전의 여유를 만들어준 친구에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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