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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Nov 21. 2021

괜찮아. 충분해. 불안해하지 마.

모범생의 생존법(황영미:문학동네:2021)

주인공이 유니콘이다. 유니콘! 이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희귀한 존재를 말한다. '모범생의 생존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청소년 소설의 세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캐릭터이다. 그러니까 원래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 하면 공부가 되지 않아서 엄청난 좌절을 했거나,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친구관계에 문제가 심각하거나 등등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모범생이다. 초, 중학교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던 준호는 고등학교를 무려 1등으로 입학해서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한다. '신입생 여러분, 인재의 요람 두성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책의 첫 페이지) 인재의 요람이라고 표현하는 두성고는 그 동네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가는 걸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1등으로 입학한 거다.


게다가 준호의 가정도 화목하다. 힘들 때 의논할 다정한 부모님이 있다. 아버지는 의료봉사활동을 해오신 분이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대신 준호를 사랑으로 키워오셨다. 지금 아버지가 암에 걸리셔서 치료를 위해 조금 떨어져 살고 있지만 부모님끼리도, 준호와 부모님의 사이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두 분이 요양가 있는 동안 돌봐줄 직장을 다니는 삼촌도 있다. 삼촌이 곧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준호는 나가서 살겠다고 하지만 삼촌은 무슨 소리냐며 결혼을 해도 같이 사는 거라고 말한다. 이 정도면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극적인 요소를 보여 줄 수 없는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가족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갈등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준호가 모범생이며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에서 시작된다. 준호는 꽤 공부를 잘하고 좋아하며, 좋아하는 과목도 있다. 서로 마음을 나누는 친구도 있다. 승승장구하던 준호의 인생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불안해진다. 1등으로 입학해서 특별 자습실에 들어간 준호는 그곳이 숨 막히게 낯설면서도 쫓겨날까 봐 두려워한다. 늘 받아오던 담임선생님의 다정한 시선과 관심이 없는 것도 두렵다. 공부로 주변의 따뜻한 관심을 받던 준호는 1등의 자리에서 내려가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각오는 했었지만 고등학교 생활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중략.. 어깨는 무겁고 불안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p. 49

야자를 마치고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걷다 보면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불쑥 떠오르고 했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었고, 홀연히 우주 너머로 가 보고도 싶었다. 그나마 어려운 문제를 많이 푼 날은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었다. p. 69


시간이 지나니 나의 고교시절에 관한 기억들이 희미해졌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라면 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수학능력시험감독을 하러 가면 매번 학생들의 긴장이 전이되는 기분을 느낀다. 이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수학능력시험 당일은 12년간 학교에서 보냈던 모든 걸 그날 하루에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달까. 낯선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그날  종일 긴장되었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학생들을 찬찬히 본다. 수능 시계를 하나는 책상에 두고, 하나는 팔에 하고 있는 학생. 똑같은 길이의 연필 열개 이상을 깨끗하게 깎아서 고무줄로 묶어 바닥에 내려놓은 학생. 수능용 컴퓨터용 사인펜과 샤프를 받자마자 필기감을 확인하는 학생. 머리를 묶어도 잔머리가 내려와 불편할까 봐 똑딱 핀을 여러 개 꽂은 학생. 그런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나의 그날이 생각난다. 말을 걸 수는 없지만, 감독을 하면서 마음속 깊이 그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준호의 불안은 고등학교 시절 모든 학생들의 불안과 닮아 있다. 갑자기 어려워진 학교 공부,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험과 수행평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도 고민인데,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상대평가이니 언제나 더 많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서는 도태될 수 있다. 다른 학생들은 더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초중고 시절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정확한 꿈이 있는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하지 않던, 성적이 좋던, 좋지 않던 이런 스트레스와 불안을 겪는다. '모범생의 생존법'은 그런 학생들의 마음을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름이 불려도 당황하기 않기 / 강풍을 대비하기 / 빌런의 등장에 흔들리지 않기

떡볶이는 먹고 가기 / 골고루 망쳤을 땐 일단 한숨 자기 / 도저히 안 될 땐 과감히 투항하기

패배에 대한 맷집 기르기 / 내 앞에 놓인 일들을 그냥 하기 / 메뉴가 별로인 날은 건너뛰기

기운 없는 친구에겐 죽을 건네기 / 밖으로 끄집어내기 / 드넓은 바다를 상상하기

고양이인가 싶을 때 다시 보기


'모범생의 생존법'의 목차다. 준호는 신입생 초반의 불안을 차츰 벗어난다. 친구, 부모님, 삼촌과 대화를 통해 생존하는 방법을 배운다. 즉, 성장한다. 존재하기는 하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다. 하늘에 있으나 보지 않는 별처럼 나는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는지 몰랐다. 늘 그랬다. 나는 모범생답게 마음이 시키는 일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았다. p. 171  자신의 마음을 모른 채 해야 할 일들만 하면서 살던 준호는 소통을 통해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희미하게나마 인지한다. 준호는 여전히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리고 불안하다. 하지만 이전의 준호의 공부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공부였다면, 지금부터의 공부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위한 공부가 되었다. 불안은 여전히 곁에 있지만, 그 불안을 인정함으로써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쪽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냥 하는 거야. 그냥 내 앞에 놓인 것들에 많은 이유를 달지 않고 그냥, 일단 하는 거지. 결과는 어차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결과를 생각하니까 불안한 거거든.”p.112

보나 선배 말이 맞다. 내적 통제감이 있어야 자존감도 유지된다. 통제권이 외부에 있는 한 나는 영원히 불안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능한 내 운명의 주도권은 내가 가지겠다. p. 153


처음 청소년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아마 직업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청소년 소설을 읽지는 않는다. 내가 재미있고 공감 가는 청소년 소설을 읽는다. 청소년 소설은 지금 청소년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한다. 그렇게 읽어낸 청소년 소설은 공감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책 추천을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추천해 주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책을 한번 읽어볼까?' 하는 학생에게 권하면 책의 재미를 붙이게 할 수 있다. '책이라는 거 생각보다 어렵지 않잖아.'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 작가가 쓴 청소년 대상 소설을 주로 읽는다. 외국작가가 쓴 청소년 소설은 주인공들의 이름은 어렵고, 번역이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문장의 리듬이 조금 떨어지고, 상황이나 이에 대처하는 청소년의 행동에 공감하기도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 청소년 소설은 간결하면서, 묘하게 리듬이 느껴진다. 게다가 우리나라 초기 청소년 소설은 소위 말하는 비행청소년의 이야기가 많았지만, 최근의 청소년 소설은 '모범생의 생존법'처럼 우리의 일상과 충분히 맞닿아 있다.(조금 아쉬운 점은 청소년에게 친근감 유발을 위해 최근에 쓰이는 은어를 끼어넣는 경우가 있는데 어른인 나로서는 적응이 어렵다. 진짜 그런 말을 쓰나 싶다.)


 '모범생의 생존법'은 다양한 학생과 함께 읽어도 좋을 책이었다. 게다가 어른인 나도 재미있었다. 가끔 그런 청소년 소설이 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나를 치유받는 기분이 드는 책. 심리상담을 하면 상담자가 차차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의 이야기부터 내담자를 치유한다. '모범생의 생존법'을 읽는 동안 한 구석에 있었던 고교시절 찌들어 있던 나를 깨끗하게 씻어준 기분이 들었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다가와  '괜찮아. 잘 고 있어. 충분해. 불안해하지 마.'라고 위로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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