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를 든 신부(오소리;이야기꽃;2019)
섬에 소녀가 있다. 소녀는 심심하다.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배를 타고 떠났다. 소녀는 결심한다. 나도 결혼하겠다고. 그래서 심심한 이 섬을 떠나겠다고 말이다. 부모님도 얼씨구나 하시면서 소녀의 결혼 결심을 돕는다. 결혼을 결심한 소녀는 두 가지를 준비한다.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와 노 1개가 그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위해 항구로 떠난다.
노를 든 신부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양화를 전공했다는 작가의 그림은 거칠고 씩씩하다. 대체적으로 어두운 색이 많이 들어갔음에도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하얀 드레스는 바닥으로 끌리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기다랗고 튼튼해 보이는 노를 든 소녀가 숲을 가로지르는 표지만 봐도 주인공 신부는 스스로 삶을 탄탄하게 걸어갈 것처럼 보인다.
심심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결혼과 섬을 떠나는 일이라고 소녀는 생각한다. 그래서 찾아다닌다. 혼자 남은 외로운 섬에서 떠나게 해 줄 남자를. 그런데 없다. 배를 타려면 노가 두 개는 필요하다는데 소녀에게는 노가 하나밖에 없고, 함께 노를 저어가자는 남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너의 노 따위는 필요 없다며 그냥 이 멋진 배에 올라타기만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소녀는 어쩐지 그런 배는 싫다. 그러다 늪에 빠진 사냥꾼을 만난다.
"왜 저를 구해 주지 않는 거죠?"
"지금 밧줄을 찾고 있어요!"
"당신에겐 기다란 노가 있잖소!"
신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오! 당신 천재예요!"
사냥꾼을 구한 소녀는 더 이상 노를 저어 섬을 빠져나가 결혼을 할 꿈을 꾸지 않는다. 소녀가 가진 노는 결혼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노는 바다만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소녀의 인생은 즐거워진다. 노를 가지고 사과를 따고 야구를 하는 소녀의 씩씩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통쾌하다. 인생을 하나만 생각하면서 살았던 어떤 시절과 나오고 난 뒤 그때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노를 든 신부'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노를 들면 배를 저어야 할 것 같고, 줄넘기를 들면 줄을 넘어야 할 것 같고, 펜을 면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선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그걸 꼭 해내기 위해 때로 달린다. 노를 든 신부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시선을 돌려보라고. 네가 가진 것이 딱 거기에만 맞는 것 아닐 거라고 말이다. 때로는 내가 가진 노가 무쓸모에 무겁기만 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건 결국 나의 노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결혼과 섬 탈출만 꿈꿀 때의 노는 하나밖에 없어서 쓸모없고 무거워 보였지만, 마음을 바꾼 소녀에게 노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이 된다. 내가 마음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 나의 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녀가 마음을 바꾸는 일은 소녀 혼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를 든 신부'의 또 다른 매력은 여기에 있다. 나는 소녀가 결국 그녀를 깨우쳐준 사냥꾼과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다. 어찌나 생각이 진부한지. 지나가다 늪에 빠진 사냥꾼은 소녀에게 노의 새로운 쓸모를 가르쳐준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에는 그런 사람이 종종 등장한다. 아니 자주 등장한다. 내가 눈치채지 못할 뿐이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생각이 변화하고 그렇게 숲을 걸어간다.
노를 든 신부의 표지는 숲을 걸어가는 신부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은. 신부가 탄 하얀 비행기가 하늘을 나른다. 그렇다. 섬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배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다. 비행기는 아마도 섬에서 배가 닿지 않은 먼 곳까지 소녀를 데려다줄 것이다.
노를 든 신부는 그림책이지만 27~30대 중반의 사람들에게 딱 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작가 오소리님이 딱 그 시절을 겪고 있거나 지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 시절은 한 길로만 가야 할 줄 알았거나, 한 길만 가면 될 줄 알았던 삶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요즘은 30대 후반일지도) 초중고대학을 나오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삶이 자연스러운 삶의 수순인 것처럼 여겨지던 것이 흔들리는 시기. 내가 가진 재주나 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기에 읽으면 맞춤처럼 딱 맞을 책이다.
소녀가 책의 뒷부분에서 노로 하는 모든 활동이 좋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사냥꾼을 구하고 난 직후의 모습이다. 커다란 사과나무의 사과를 노를 들어서 따는 장면. 기다란 노로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금방 순탄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그 순간의 반짝임과 기쁨, 그리고 나아가는 한 걸음의 순간을 그 장면이 잘 보여주고 있다. 보고 있으면 다시 새로운 한 걸음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단전에서 끓어오른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맛집을 보면 먹고 싶어서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 외딴섬에 갇혀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지루할 때 '노를 든 신부'를 읽으며 그림 속의 소녀처럼 빨갛고 맛있는 사과를 딸 힘을 얻어내 보련다. 가만히 나의 외딴섬에 앉아서 심심하다고 외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일단 그런 마음이 들면, 일어나서 찬찬히 걸으며 듣고 보고 나를 돌아보며 세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찾아보자.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걸 타자. 아니 타지 못해도 괜찮다. 때로는 걷는 것만으로 충분히 충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