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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Jul 20. 2022

돌아본다

돌아보지 마세요. 내 앞에 걸어가는 아는 사람의 실루엣을 만나면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리고 걸어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걸음을 늦춘다. 아는 사람과 만나서 대화는 주변을 돈다. 일상적인 대화, 그리고 침묵, 또 어찌어찌 꺼낸 예전에 했던 말. 그로 인해 친근감을 느꼈던 사람과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화사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만 하고 각자의 걸음으로 걸어가면 좋지만 우리는 만나면 안부를 물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서로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고, 눈을 마주치며, 마치 오래전부터 궁금했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눈다. 헤어지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말들을.


그날도 그랬다. ‘돌아보지 마세요.’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친구 할머니가 불과 3m 앞을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6살 때부터 꾸준히 놀이터에서 만나고 있지만 우리는 겉을 뱅뱅 도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한 번씩 튀어나오는 그 집의 커다란 이야기들에 나는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고 말을 잊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의 앞 3m에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 앞 2m 거리에 신호등이 있었다. 우리는 저 신호를 함께 건너야 한다. 그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신호를 건너기 위해 뛰는데 그 순간 할머니는 걸음을 멈추었다. 멈칫. 할머니가 건너고 다음 신호에 건너려고 했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본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둑해진 거리에서 정확하게 나를 본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순간 움찔했다.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3m의 거리를 좁혀온다. 나는 인사를 한다. 할머니는 마치 네가 내 뒤를 천천히 쫓아 오는 걸 알았다는 듯이 태연하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거신다.


“저기에 새로 비누 가게가 생겼는데 비누가 너무 좋아.”

“아 그렇군요.”

“비누가 지금 할인판매를 해서 만원이더라고요.”

“네.”

“그걸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난데.”

순간 내 눈이 반짝.

“머리가 난다고요.”

“어찌 나 지금 비누 사러 갈 건데 같이 가볼래요.”

세일 한다는 말에 덥석 따라나섰다.


할머니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선물로 그 가게의 비누를 드렸는데 몇 개 모자라 사러 간다는 게 다른 물건들만 사고 깜박하셨단다. 나는 또 얼마 전에 엄마를 잃은 할머니에게 건넬 말을 찾지 못하고 내 눈은 허공을 맴돈다. 위로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하지 않기로 한다.


갑자기 만난 나를 데리고 가는 건 순수한 호의였을 거다. 써보니 정말 좋았던 그 물건을 권하고 싶은. 어렸을 때는 어른들의 호의가 달갑지 않았고, 그분들이 가는 이상하고 작은 가게들이 미덥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간판도 없고 마치 창고 같은 작은 가게로 가서 나에게 반찬통을 사주셨다. 점핑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는 선생님이 단백질 셰이크를 권하셨지만 사지 않았는데, 같이 운동하는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아주머니가 추천하셔서 두 통을 샀다. 귀 얇은 나는 그렇게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에 잘 앉아 있고, 잘 산다.


물론 실패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 10년 전에는 학생의 초청장을 거절하지 못해 이끌려 갔던 교회에서 바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단백질 셰이크는 아주머니는 살이 빠지고 근력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 일들을 끊임없이 겪으면서도 나는 돌아본 할머니를 따라가고 말았다. 사실 둘이 나란히 대화를 나누는 걸 늘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말이다.


따라갔더니 할머니가 추천한 탈모, 샴푸는 할인판매를 하지도 않고, 샴푸의 뒤에는 도대체 뭐로 만들어졌는지 적혀있지도 않았다. 그냥 한방용품으로 만들었다는 기록만 있는 생전 처음 보는 샴푸였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기대 어린 눈빛에 사고 말았다. 할머니는 선뜻 따라와서 구매까지 한 내가 좋았는지 사장님에게 샘플 비누를 서비스로 주라며 압박해주셨다. 덕분에 여행용 샘플 비누까지 얻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샴푸를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일을 저질러 버렸을까. 20 인생의 독립기부터 시작된 호구의 삶은 꾸준하기도 하다. 샴푸는 결론적으로 아직은 성공적이다.  샴푸는 진짜로 린스나 트리트먼트를 쓰지 않아도 머릿결이 부드럽다. 린스를 쓰고 다시 헹구는 수고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크게 손해 보는  아니면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생의 다양한 면을 보면서 이렇게 사는 거지. 덕분에 평범하게 생긴  답지 않게 남들하지 않을  같은 경험을 여러  했다. 학교 다닐  선배들이 “ 이렇게   믿어서 어찌 살래. 걱정이다.” 했을  선배들이 나를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대로  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니다 싶으면 냅다 뛰쳐나오는 것도 아주 잘한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경험치는 많지만, 불행했던 경험치는 적다. 호기심은 많지만, 몰입도는 떨어지는 나의 가벼운 마음 덕분이다. 세상은 넓고 세계 인구는 70억이 넘고. 그중에 나 같은 사람은 또 있겠지만. 나는 그냥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돌아보면 다 즐거운 추억이니 그냥 생긴 대로 살련다. 새로 사들인 300mL에 2만원 샴푸도 만족스럽다. 또 사러 갈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머리카락이 진짜 풍성해진다면 아무리 비싸고, 좀 수상해도 사러 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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