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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ug 30. 2021

뜬금없이 고마운 사람들이 떠오르게 하는 책

대성당(레이먼드 카버: 문학동네)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책을 읽으면서 중심에 두었던 인물 이외에 다른 인물에 관해 생각해보기로 해요.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나, 아내, 맹인, 맹인의 아내는 각자 어떤 역할로 여기에 등장하게 된 걸까요?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게 감정을 싣고 읽었다면 이번에는 다른 인물에게 '왜?'을 질문해 보도록 해요. '아내'는 손님을 초대해 놓고도 '나'에게 맡겨버린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하셨는데 왜 그랬을까요? 오랜 시간 '맹인'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또 '맹인'은 어째서 부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슬퍼 보이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의 공격에 이렇게나 편안하고 멋진 모습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요? '아내'에 이어 '나'도 맹인의 매력에 빠져드는데요. '맹인'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타고난 걸까요?"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가을에 시작하는 독서토론 줌 강의를 처음 시작한 날이었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강의를 듣는 것인 줄 알았는데 문학 자료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해보는 토론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개의 정보가 들어오면 5개 정도를 읽고 2개는 왜곡하고, 2개는 잊어버리고 1개만 제대로 듣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이 강의도 그렇다. 출퇴근 길에 보이는 플랫카드를 보고 '길 위의 인문학'이라니 재미있겠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신청했다. 인문학 강연을 들을 거라 기대하면서. 그런데 임박해서 도서관에서 보내진 메시지. "책은 다 읽으셨지요. 책에서 읽은 내용 중에 인상 깊은 구절을 함께 나누도록 해요. 올려주세요." 아니 책이라니.  속은 기분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프로그램 홍보지를 본다. 진짜다. 이 프로그램은 10주 동안 10권의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는 거였다.


잠깐 포기할까도 했지만 이렇게 줌으로 하는 성인 독서토론의 형태가 궁금해져서, 3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어떻게 토론을 하나 싶어서 첫 번째 책인 '대성당'을 읽었다. 레이먼드 카버라니 나만 모르고 다 아는 유명한 단편소설의 대가였다. 미국의 소시민에게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소소한 이야기인데 읽는 사람의 명치를 답답하게 한다고 해야 하나, 때린다고 해야 하나 읽고 나면 이상하게 갈비뼈 사이가 무거워지는 단편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대성당'은 단편소설집의 제일 마지막에 다루고 있지만 모임을 해야 하니 제일 먼저 읽었다.


 오래전 알게 된 '맹인' 친구를 둔 '아내'가 이 친구를 초대한다. '맹인'은 얼마 전에 부인과 사별을 하였는데 부인의 친척을 찾아가는 도중 오랜 시간 우편으로만 연락하던 친구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아내'는 '맹인'친구와 테이프로 녹음한 편지를 주고받기만 할 뿐 만난 지는 오래되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맹인'친구가 오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맹인' 친구가 집으로 온다. 함께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 그러는 동안도 '나'는 방관자처럼 있었다. 그러다 '아내'가 옷을 갈아입으러 올라가고 '나'는 '맹인'과 둘이 남는다. 텔레비전을 돌려보다가 '대성당'을 축조하는 내용의 다큐를 보게 되고, '나'는 '맹인'에게 대성당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대성당이 무엇인지 한 번도 세상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맹인'에게 설명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 것 같다. 나도 그러했는데, 강의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분들이 대부분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토론의 마지막에 강사님이 던진 내가 감정 이입한 인물 외의 인물을 떠올리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맹인'의 지혜, 다른 사람을 한 단계 높여주는 이끌어 냄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음.. 제 생각에 맹인은 오랜 시간 다른 사람의 시선과 질문을 받아서 단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편견 어린 시선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대답해 온 게 아닐까요?" 나의 생각에 다른 분이 타고난 밝음, 천성이 아닌가라는 말을 하셨다. 토론이 끝나고도 나의 마음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강사님이 내가 감정이입을 한 인물 이외에 다른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그리고 '맹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왜 그런 대답을 내놓았는지, 그리고 진짜 답은 무얼까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 끝에 결국은 '모든 것의 총합이 그다'라는 아주 일반적인 대답이 내 안에서 들려왔다. 지혜롭고, 밝고, 매력적인 '맹인'의 시작은 아마도 타고난 DNA가 한몫했으리라. 거기에 훌륭한 양육자, 그리고 주변에 좋은 지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스쳐가듯 그를 동정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있었겠지만 그런 것들을 다 이겨내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까지 매력으로 빠뜨리는 어떤 힘을 그가 가지게 된 것은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훌륭한 양육자는 없었을 경우도 있다. 좋은 지인 한 명과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 한 권을 시작으로 그의 현재가 완성되었을 수도 있다. 타고난 어떤 것이 있긴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맹인'의 밝음과 지혜에 관해 이렇게나 고민하는가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네 이 자체가 나의 편견이구나. '반짝이는 박수소리'의 이길보라 감독은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님의 수화 대화가 우리가 말로 하는 대화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고 말했다. 수화로 대화하는 세상은 음성언어로 대화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책읽아웃에서 김하나 작가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때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다시 찾아보았다.


김하나: 때로는 음성언어보다 더 많고 아름다운 것들을 충분히 표현하고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사회이고, 내가 그것을 장애라고 인지하지 않고 나는 이런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고 인지하는 게 얼마나 큰 세계가 열리는지.. 그게 너무 멋지게 느껴졌어요.


이길보라: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모든 농인이 다 긍정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서 일반화할 수는 없는 것 같고요. 엄마아빠의 경우는 선천적으로 유쾌한 건 아니었던 것 같고 유쾌하게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책읽아웃] '괜찮아 경험'이 중요한 이유 (G. 영화감독 이길보라) | YES24 채널예스         

                                                                       

두 사람의 대화가 내가 '대성당'을 읽고 책 이야기를 하면서 찾고 있던 답이 아닐까 했다. 선천적으로 유쾌한 건 아니었지만 유쾌하게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산다는 것. 틀린 게 아니라 다르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관한 편견을 깨 주었던 '책읽아웃 이길보라 편'을 다시 듣고 있자니 어쩐지 명치에 걸려있던 답답함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르게 사는 사람에게 그다지 편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그로 인한 불편함이나 조금 더 슬프고 힘든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성장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아무튼 이래저래 결론은 아직 부족한 나에 대한 조금의 반성에서 눈을 감고 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관한 사색으로 얻어진 더 넓어진 나의 시야에 관한 기특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상처 받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웃으며 또 새로운 일을 벌이고, 걸어가는 길을 주저하지 않게 해주는 '유쾌하게 삶을 살아 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갑자기 고마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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