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박지리:사계절:2016)
1985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난 작가는 오랜 지병으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는 2010년 합체라는 소설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후로 사계절 출판사에서 맨홀, 양춘단 탐방기 등을 쓰면서 출판계에 호평이 이어졌고 사계절 출판사도 작가를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내가 이번에 읽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별이 되고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57회 한국문학상 어린이 청소년 부분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뮤지컬로 상영되기도 했고, 지금은 박지리 작가의 초기작 합체가 국립극장에서 뮤지컬로 만들어져 공연 중이다. 사계절 출판사에서는 박지리 작가를 기리는 박지리 문학상도 만들었다. 단 6년간 청소년 작가로 활동했지만 그녀는 한국 청소년 문학에 큰 울림으로 남아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박지리 작가를 몰랐다. 내가 모르는 작가가 한둘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청소년 책을 가장 많이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청소년 책을 많이 출판하는 사계절 출판사를 알고 있음에도 박지리 문학상이 생길 정도의 작가를 몰랐다는 게 신기했다. 나만 모르나 싶어서 주변에 선생님들께 여쭤봤는데 대다수 고개를 갸웃하신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얼마나 좁은가.'
인간 진화에 관한 미싱 링크를 찾아서-인간은 선과 악의 변이와 선택으로 진화한다.
“분명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데, 아무도 서로의 내면에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인간. 모두의 인간이면서, 오직 나 하나만의 인간!”
Yes24책 소개 중에서
이 책은 학교에 새로 오신 사회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셨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유명하다니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겼달까. 책의 표지는 어둡고, 채의 두께는 엄청나고(약 850쪽) 제목은 묘하게 매력적이다. 다윈, 기원 같은 말은 찰스 다윈을 연상시키고 악이라고 적고 검은 표지에 후드 집업을 입은 사람이 등장하니 무섭고 어두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작은 어딘가 숭고하다. 책은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프라임 스쿨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이야기는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프라임 보이 다윈 영에서 시작된다. 프라임은 주된, 주요한, '최고의' 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학교는 그만큼 최고의 남학생들만 다닌다.
박지리 작가가 만들어 낸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 등장하는 장소는 이 세상에는 없는 곳이다. 1~9 지구까지 소의 등급을 나누듯 지역을 나누어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윈 영은 최고로 좋은 지구인 1 지구에 살고 있으며 아버지는 문체부 차관의 직책을 가진다. 이 세계에서 문체부 차관은 차기 대통령의 유력 후보다. 그러니까 다윈 영은 최고의 아버지를 가진 최고의 학교에 다니는 1 지구에서도 1 급수의 학생이다. 소년은 그럼에도 잘난 체 하지 않고 겸손하며, 따뜻하다. 마치 온실 속에 사란 화초처럼 청초하다.
그랬던 다윈 영이 변이와 선택으로 진화한다. 그 방향이 진정 악인가? 는 의문이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할아버지에서 시작된다. 800페이지가 넘는 대장정에는 다윈 영외에도 다윈 영의 프라임 스쿨 친구 레오와 다윈 영이 짝사랑하던 루미라는 학생이 등장한다. 이 두 아이는 다윈 영의 아버지의 친구들의 자녀들이기도 하다. 다윈 영의 이야기도 할아버지에서 시작되듯이 루미와 레오의 이야기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서 시작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굴레 또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 상황 같은 것들은 그들의 아버지 세대들이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다. 아버지들은 그들의 부모에게서 어떤 굴레를 받았고 이는 자녀들에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여 전이된다.
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처음이지만 완전히 다른 색감의 어떤 이야기를 구사한다는 건 알겠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달려간다. 요즘 우리나라 소설을 보면 한 개의 주제로 말하기 어렵다.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 각자 삶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어, 모두가 나의 이야기 나의 주변 이야기 같으면서 공감을 자아낸다. 물론 주인공이 있고 기둥이 되는 이야기가 있지만 다른 요소들도 썩 재미있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런데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하나를 향해 묵직하게 나아간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찾기 위한 기차가 칙칙폭폭 나아가는데 모든 대사와 지문들이 쓰이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800페이지가 지루하지 않다. 그 안에는 추리적인 요소가 담겨있고, 악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만 세팅된 세계가 있다. 이 요소가 우리를 지루하지 않도록 한다. 긴 호흡인데도 끊임없이 독자를 긴장시킨다.
인간의 언어 습관과 시간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동사에 조금씩 변형을 가한다는 설명이었다. 다윈은 그 설명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동사라면 오히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더 철저하게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규칙보다 불규칙에 치우쳐 언어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규칙보다는 불규칙으로 진화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것 같았다. 456
다윈 영의 아버지 이름은 니스다. 니스는 프랑스 니스를 표현 단다고 니스 영의 아버지가 말한다. 힘겹게 살아온 자신보다 아들은 프랑스의 니스라는 휴양지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서 지었다고 말한다. 다윈 영의 할아버지이자 니스 영의 아버지인 그의 이름은 러너 영이다. 삶을 개척하기 위해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삼대로 이어지는 기원은 마치 우리의 가족관계와도 유사하며, 다윈의 선택과 변이는 거부감을 일으키지만 그럼에도 수긍이 간다. 청초한 다윈의 변화는 안타깝고 아쉽지만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다. 루미의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과 약은 선택들 또한 불쾌하지만 우리의 한 단면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들이다. 그중 부모에게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것 또한 사실이며,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그런 지점들을 꼼꼼하게 짚어낸다. 문장 문장이 끊임없이 변주를 보이며, 각자 다른 삶을 선택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살인이 가장 흔한 생존 방식 중 하나였던 시대에 일어난, 평상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도 기원을 끝까지 밝혀 가며 살 수는 없다.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살인하지 않은 조상을 가진 핏줄이 과연 단 하나라도 있을까? 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