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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pr 02. 2021

공기처럼 자유롭게

칼 노락


내 소개를 했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공기처럼 자유로운 파블로’라고해!”


공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 파란말의 이야기를 처음에 읽고 눈물이 글썽했다. 파란말은 결국 자유를 찾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란말이 사람에게 잡혀 계속 자유를 갈구하며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모습은 아름다운 배경과 맞지 않게 슬프다. 파란색으로 점점이 쓰인 글씨는 파란말의 아픔을 덤덤이 이야기한다. 맞은편에는 파란말의 그림이 나오는데 세상은 너무나 크고 파란말의 모습은 아주 작다. 단 한 번도 파란말이 크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나오지 않는다. 큰 풍경 속에 작은 점 같다.


파란말의 모습에서 인디언, 흑인 노예, 빠질 길 없는 무기력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또는 파란말은 마지막에 파란말을 풀어주는 착한 카우보이 소년 자신일 수도 있다.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지만 세상은 파란말을 벗어나지 못하게 계속 묶어둔다. 누구나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파란말과 같은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책의 마지막은 마치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그곳으로 말은 소년을 태우고 힘차게 날아오른다. 찔끔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때 떠오른 것은 속박당하는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기력과 그에 따른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것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그림을 감상하며 책을 읽는다. 모든 글줄은 담담하다. 그림은 강렬한 색감으로 가득하다. 처음 글을 읽을 때는 계속 우울했었다. 두 번째 다시 읽을 때는 더 이상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소년과 말은 절벽에서 힘차게 날아올라 마침내 천국 같은 곳에 도착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처음 읽을 때 이 마무리는 그림 동화의 억지스러운 행복한 마무리처럼 느껴졌었다. 다시 읽으니 다르게 읽힌다. 주홍빛의 거친 땅의 끝은 파란말 같기도 하고 파란 하늘 같기도 한 파란색으로 덧칠해진 절벽이다.


눈을 떴을 땐, 아주 멋진 정원에 와 있었지.

소년이 말했어, 누군가 이곳에 천국 씨앗을 심어 놓았나 보다고.

바람이 어루만지고 햇살을 반짝이고, 저 높이 하늘엔 새가 있어.

“엄마 엄마가 어디에 있든 자랑스러워해도 돼요. 엄마의 아들 파블로, 공기처럼 자유롭거든요!”


파블로는 소년과 함께 처음으로 진짜 자유를 느낀다. 파블로에겐 사람들에게 잡히기 전부터 지금까지 파란 하늘, 새, 우거진 풀숲을 진정으로 즐긴 적이 없다.(그림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의 자유를 향해 날갯짓을 시작했을 때 진짜 자기가 바라던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아주 어린 파블로가 엄마에게 들었던 바로 그 세상이다. 사람에 잡히기 전에 파블로는 자유로웠지만 진정한 자유를 만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가 아니라 내 마음으로 느끼는 자유. 꼭 파블로처럼 시련과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책은 말한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유에 대한 깊은 고민의 과정에 한 발 자국의 용기가 더해져야 진짜 자신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이제 마지막 장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파블로가 자유를 향해 절벽에서 날아올랐을 때 이미 삶과 죽음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파블로가 진정한 자유를 찾았음에 조용히 그를 칭찬해주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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