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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pr 10. 2021

곧 이 방으로 사자가 들어올 거야.

아드리앵 파를랑주

이 방은 사자의 방이다.


사자의 방이니 언젠가 사자가 들어올 거다. 무서운 것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면 숨는 건 아주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사자는 나를 잡아먹거나 해칠지도 모르니 일단 사자의 방에 들어온 그들은 숨는다. 사자 몰래 사자의 방에 살그머니 차례차례 들어온 것은 아이, 개, 새다. 그들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두려워한다. 그리고 숨는다. 무서운 사자가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이들은 왜 사자의 방에 들어왔을까? 모두 어린아이들. 그들의 호기심이 이곳으로 들어올 용기를 주었을까? 아이들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만큼 겁도 많다. 지나치게 무모하고 겁이 없이 행동하다가도,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일에 겁을 낸다.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눈으로 봤을 때 말이다.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의 세상과 다르다.


런데도 어른의 눈에는 무지와 호기심이 섞여있는 행동처럼 보인다. 정확한 정보와 앎은 없지만 호기심은 자꾸 생기니 무서운 줄 모르고 만져보고 부딪혀 본다. 그러다 혼나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면서 두려움을 학습한다. 사자의 방에 들어간 아이들은 사자가 무서운 존재인 건 알고 있지만 호기심이 이를 이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어 누군가 들어오기만 하면 깜짝 놀라며 구석구석에 숨는다. 하지만 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고 살펴볼 만큼의 용기는 없는 듯하다. 그래서 아는 우리는 재미있고 안타깝다. 가르쳐 주고 싶어 진다.


사자는 집으로 돌아와서 깜짝 놀란다. 집에 완전히 달라져 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방의 모습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떤다. 사자의 두려움 모름에서 온다.  아이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존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귀신이다. 초등학생들 사이에 끊임없는 귀신과 괴담이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아마도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 않을까? 자라면서 점점 보이지 않는 귀신보다는 보이는 사람과 물건, 자동차 같은 존재들이 더 무서워지지만 말이다. 


알면서 무서운 것과 모르면서 무서운 것 어느 것이 더 무서운 걸까? 무서움에서 벗어나려면 뭘 해야 할까?


마지막에 등장하는 생쥐는 두려움이 없다. 새들이 숨어 있어서 팔랑이는 커튼과 사자가 뒤집어쓰고 있어서 폭신해진 이불, 그리고 아이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이상하게 그 방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질 뿐이다. 생쥐는 사자가 뒤집어쓴 이불 위에서 잠이 든다. 자신 이외의 모든 존재가 두려움에 떨며 숨죽이고 숨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이하여 어제는 달디단 물이었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그렇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일 뿐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원효는 그토록 원했던 깨달음을 해골물에서 얻었어.

  [네이버 지식백과] 원효 [元曉] - 불교계의 새 바람 (한국사 개념사전, 2010. 6. 4., 공미라, 김수옥, 김애경, 김지수, 노정희)


누구나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닐까? 다른 사람에겐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이지만 나에게 나는 이 세상의 중심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보인다.  남편과 이야기하다가 남편은 스마트 폰에 지문인식을 두 개를 등록한 걸 알게 되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손가락이 하나 혹시 잘리면 다른 손가락으로 지문인식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그런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른손 검지 하나만 지문등록을 해 두었다. 같이 일상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렇게나와 걱정의 수준이 다르다니 다시 한번 신기했다.


사자가 두려워 숨은 아이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두려워 숨은 사자, 그리고 천하태평 꼬맹이 생쥐 모두가 나의 모습이다. 그리고 세 모습 다 불안전하다.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정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내 안에서 저 세 모습의 적절한 불안과 태평이 균형을 이루어야 몸도 마음도 세상 살기도  편해지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다양하여 나는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사람마다 다른 다양한 두려움의 고저를 "그렇구나"  해주는 정도의 타인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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